2017.04.07 17:22

운현궁 인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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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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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7호로 지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高宗:재위 1863∼1907)이 출생하여 12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성장한 잠저(潛邸)이다. 철종(哲宗:재위 1849∼1863)의 뒤를 이어 고종이 즉위하자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생모 민씨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봉작을 받았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운현궁에서 중국 (淸)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다. 흥선대원군의 한옥과 양관(洋館)을 모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원래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대원군이 즐겨 쓴 아재당(我在堂)은 없어지고, 한옥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노락당(老樂堂)과 별당채인 이로당(二老堂)만이 남아 있다. 또한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사당(祠堂)도 있었으며, 고종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는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이 있었으나 모두 헐리고 없어졌다. 

노안당과 노락당은 가운데에 큰 대(大廳)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데, 노안당은 초익공 양식을 이루고 노락당은 칠량집으로 우물천장이다. 운현궁의 양관은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李埈)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는데,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純宗)의 아우인 의친왕(義親王)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 일부로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운현궁 [Seoul Unhyeongung, ─雲峴宮]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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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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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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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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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전시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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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 터

 

 

<천도교 중앙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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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유형문화재 제36호. 1918년 당시 천도교 부구(部區) 총회의 결의에 따라 이듬해 7월에 착공, 21년 2월에 준공된 건물로 대지 1,824평, 건평 212평이며 화강석 기초에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단층구조로 중간에 기둥이 없이 천정을 철근 앵글로 엮고 지붕을 덮었다. 그리고 전면에 2층 구조의 사무실을 붙여 짓고 그 중심인 현관부를 바로크풍 탑 모양으로 높이 쌓아올려 고풍스런 느낌이다.

교당의 수용인원은 1,000명 이내이다. 이 건물은 당시 3대 교주이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가 건평 400평 규모로 짓고자 계획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규제로 축소, 재설계하여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석재는 창신동 돌산에서 채석하여 쓰고 철제 앵글재는 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건축공사비는 교인 각 세대당 10원씩의 성금을 갹출 30만 원을 거두어 27만 원을 공사비에 충당하고 나머지는 3 ·1운동 자금으로 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도교중앙대교당 [天道敎中央大敎堂]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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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미술관 (박영효 집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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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주년 된 승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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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동교회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교회로 출발하였다. 승동교회는 경기도 내 장로교회의 모교회적(母敎會的)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교회의 설립 과정을 보면 먼저 헤론(John W. Heron)이 1894년 동현(銅峴)에 홍문동교회(弘文洞敎會)를 세웠다. 이 교인 중에는 독립협회계(獨立協會系) 인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선교사를 구타하여 축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로 교인들은 분파되어 각기 교회를 세웠다. 독립협회계 교인들은 1904년 승동교회를 세웠고, 나머지 교인들은 남대문교회로 발전했다. 남대문교회는 북장로교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 지하에서는 당시 경성의 각 전문학교 대표자 20여명이 모여 3ㆍ1운동의 지침과 계획을 논의한 바 있다. 또 이 교회에서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창립되어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 때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승동교회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약 200평 규모이며, 설계자와 시공자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주변 건물에 가려 본래의 당당한 위풍을 볼 수 없으나, 설립 당시에는 주변 건물에 비해 높고 당당한 건물이었다. 지붕 형태는 십자형 박공지붕인데, 전면의 박공은 크고, 측면의 박공은 2단으로 처리되었는데 현재는 내부의 제단을 넓히면서 후면에 2단 박공처리되었다. 정면에서 중앙부는 대형 아치창(현재는 현대적인 사각창호로 개조됨)을, 그 좌우는 소형 아치 개구부(현재는 현대적인 출입구로 개조됨)를 두고, 박공에는 원형 창을 냈다. 승동은 인사동에 편입되었으나, 설립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승동교회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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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 기념 터, 이율곡 선생 살던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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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 (1919년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 있던 자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8163&cid=49282&categoryId=49282

손병희, 주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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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자결 터

  • 한말의 충신 민영환은 을사조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후 피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 하였다. 선생의 집은 견지동 27-2 현 조계사 경내에 있었다. 종로구 인사동 공평빌딩 부근 민영환의 자결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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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와 우정총국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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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총국

1884년(고종 21)에 베푼 우리나라 최초의 우편행정관서. 조선시대의 통신수단은 역참제(驛站制)에 의해 이루어지다가 84년 근대적 통신제도를 처음 도입하여 우정총국을 베풀었다. 병조참판 홍영식이 총판(總辦)에 임명되고, 박영효 등 15명이 사사(司事)가 되어 사무를 분담했다. 조선정부는 이해 처음으로 일본·영국·홍콩 등 외국과 우편물 교환협정을 맺고, 11월 17일 역사적인 근대우편제도의 첫 사무를 시작했다. 이때 서울의 총국과 인천의 분국(분국장, 이상재(李商在))이 제1차로 개국했다. 그러나 개국 17일이 지난 12월 4일 우정총국 낙성식을 틈타 개화당의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폐쇄되어, 95년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구제도인 역참에 의한 통신이 계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정총국 [郵政總局]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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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대한불교조계종의 직할교구의 본사(本寺)이자 총본사로 중앙총무원 ·중앙종회(中央宗會) 등이 있는 한국 불교의 중심지이다. 1395년(태조 4) 창건된 사찰로 1910년 승려 한용운(韓龍雲) ·이회광(李晦光) 등이 각황사(覺皇寺)라 불렀던 유래가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태고사(太古寺)로 불리다가 54년 불교정화 이후 조계사로 개칭하였다. 이 절은 대웅전(大雄殿)의 규모가 웅장할 뿐 아니라 문살의 조각이 특이한 것으로 유명하며,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서울 수송동백송(白松)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계사 [曹溪寺]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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