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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왕릉 투어 날.  고양 서오릉과 서삼릉 (조선왕릉 사이트 참조)

 

 

<서오릉>

http://royaltombs.cha.go.kr/html/HtmlPage.do?pg=/new/html/portal_01_10_01.jsp&mn=RT_01_10

 

서울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창릉·익릉·명릉·경릉·홍릉 등 5기의 왕릉이 있어 서오릉이라 한다. 총면적 55만 3,616평으로 구리시의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의 왕실 족분군이다.  

 

1457년(세조 3) 세조는 원자였던 장(璋, 덕종으로 추존)이 죽자 길지를 물색케 했다. 이때 지금의 서오릉터가 순산순수(順山順水)의 길지로 간택되어 세조가 직접 답사한 뒤 경릉(敬陵)터로 정하매 조선왕족의 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뒤 덕종의 동생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昌陵),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을 합쳐 부르는 명릉(明陵),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弘陵)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 불렀다.

서오릉엔 그밖에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빈 윤씨(恭嬪尹氏)가 묻힌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를 신촌에서 옮겨온 수경원(綏慶園),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서오릉은 1970년 사적 제198호로 지정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오릉 (답사여행의 길잡이 9 - 경기북부와 북한강, 초판 1997., 13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김희균, 김성철, 유홍준, 문현숙, 정용기)

 

능(陵)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
원(園)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
묘(墓)

나머지 왕족(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과 폐왕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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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매표소 앞 서오릉 지도 앞에서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오릉에 대한 전반적 이야기 들으며 명릉으로 이동하여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경릉:  덕종 (9대 성종의 부친. 추존), 소혜왕후 한씨

창릉:  예종 (8대), 안순왕후 한씨 (계비)

명릉:  숙종 (19대), 인현왕후 민씨 (계비), 인원왕후 김씨 (계비)

익릉:  인경왕후 김씨 (19대 숙종의 비)

홍릉:  장성왕후 서씨 (21대 영조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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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가까운 명릉.  숙종과 두번째 왕후인 인현왕후의 쌍릉 (정면 오른쪽 언덕)과 세번째 왕후 인원왕후 김씨 (왼쪽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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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은 같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서로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으로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고 왼쪽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이다.

 

숙종(肅宗) 이야기

숙종(재세 : 1661년 음력 8월 15일 ~ 1720년 음력 6월 8일, 재위 : 1674년 음력 8월 23일 ~ 1720년 음력 6월 8일)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아들로 1661년(현종 2)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나, 1667년(현종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74년에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살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총명하고 영특하여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 재위기간 동안 1680년에 경신환국(유악(油幄) 사건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 1689년에 기사환국(경종 탄생으로 원자칭호 문제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 교체), 1694년에 갑술환국(인현왕후 복위 문제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으로 서인과 남인 정권을 이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고, 전국적인 대동법(大同法) 실시와 양전(量田)의 실시, 화폐주전을 통용하는 등 경제정책에 전력을 다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 시켰고, 2대 정종의 묘호 추숭과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 『선원록』 작성 등 왕실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그 후 1720년(숙종 45)에 경덕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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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제:  왕실에서 역대의 국왕이나 왕후의 기일(忌日)에 각 능(陵)에 지내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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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와 어로 양 옆에는 변로를 깔아 놓아 겉으로 봤을 때 4개의 길로 보인다. 비각 안에는 2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표석이고 또 하나는 인원왕후의 능표석이다. 능침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특히 숙종의 명으로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감소하기 위하여 석물치수를 줄였다. 대표적으로 8각 장명등이 4각 장명등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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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

기본적으로 능 하나에 재실이 하나씩 별도로 지어졌으나 현재 서오릉에는 명릉 재실의 일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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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원 (사도세자 어머니 묘)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장조의 사친인 영빈 이씨의 원이다. 수경원은 처음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가, 1899년(광무 3)에 수경원으로 높여지자, 원의 형식에 맞게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이후 수경원은 1970년에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입구에는 대한제국때 세운 원표석이 있고, 원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만 조성하였다. 그 밖에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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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익릉. 숙종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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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널찍하고 쭉 뻗은 소나무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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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익릉의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에서 유일하게 익랑이 설치되어 있는 정자각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의 동자석주 상단부에 12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고, 대부분의 석물 조각은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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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원:  

 

조선 13대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이다. 원소는 추존 덕종의 경릉(敬陵)의 예를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과 표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만 조성하였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세자는 13세에, 세자빈은 41세에 돌아가셨으니 부인은 남편의 어린 모습만 기억하고 살아갔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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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추존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에 왕의 호칭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시호를 받았으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경릉은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왕, 오른쪽 언덕(동쪽)이 왕비의 능이지만, 경릉은 오른쪽 언덕(동쪽)에 덕종을 모셨고 왼쪽 언덕(서쪽)에 소혜왕후를 모셨다. 이는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분에 맞게 능을 조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덕종의 능침은 장례를 간소히 치루라는 세조의 명으로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여 봉분을 크게 만들었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만 배치하고 나머지 석물은 생략하였다. 소혜왕후의 능침은 일반 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여 봉분은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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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바라 보며 오른쪽 언덕 위. 덕종 (세조 장남. 의경세자. 20세에 돌아가심).

맞나... @@  세조 다음이 예종 (세조 차남. 덕종 동생).  예종 다음이 성종 (덕종과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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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덕종의 부인 소혜왕후 한씨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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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묘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사친인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묘이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묘표석을 배치하였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곡장을 둘렀다. 묘표석에는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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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  조선 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

정성왕후 한 분만 모신 단릉의 형식이나,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도 쌍릉의 형식을 생각하여 글을 새겼다. 능침은 숙종의 명릉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 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은 구름 형태의 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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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왼쪽 빈 자리가 원래 영조 임금이 누우실려고 했던 자리.

1757년(영조 33)에 정성왕후 서씨가 세상을 떠나자 예종의 창릉 동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숙종의 명릉(明陵)제도를 참작하여 쌍릉 형식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잡아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허우제(虛右制)로 홍릉을 조성하였다. 석물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고 비워있는 자리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어 표기하게 하였다. 그러나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능 자리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효종의 구 영릉(寧陵) 자리로 최종 결정되어 원릉이라는 이름으로 영조의 능을 조성하였다. 이로 인해 홍릉의 오른쪽 자리는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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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릉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예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창릉의 두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상설은 왕과 왕비가 비슷하다. 예종의 능침의 장명등은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고,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의 무늬가 도깨비가 아닌 북고리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유일하다.

 

예종(재세 : 1450년 음력 1월 1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 재위 : 1468년 음력 9월 7일 ~ 1469년 음력 11월 28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에 수양대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고, 형인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1457년(세조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68년(세조 14)에 세조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남이의 옥사를 진압하였으며, 1469년(예종 1)에는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재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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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릉 관람 후 서어나무길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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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큰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많이 메마른 느낌이다.  색깔도 칙칙하고.

서오릉 산길은 오르락 내리락 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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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 보이는 인성대군 (예종의 장남.  3세에 돌아가심) 초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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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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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서삼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禧陵)을 조성하면서 조선왕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뒤 중종의 정릉(靖陵)이 조성되었으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 곁으로 옮겨갔고, 중종의 아들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 철종과 비 인철왕후 김씨의 예릉(睿陵)이 있어 서삼릉이라 부른다. 서삼릉엔 그밖에 소경원·의령원·효창원 등 세자의 원(園) 3기와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를 비롯해 조선 말 고종의 2남 의친왕 묘에 이르기까지, 조선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 45기가 있는 광범위한 조선왕실 족분군이다.

 

이곳엔 200여 평의 공간에 사방 담을 두른 조선왕조의 태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있는 태조의 태묘를 비롯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임금의 태묘 21위, 대군·세자·공주 등의 태묘 32위, 총 53위의 태묘를 한데 모아 이곳 태실에 안치했다. 왕실에서 사용했던 태항아리를 비롯해 함께 묻었던 부장품들을 빼돌리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지금 이곳에 묻혀 있는 태들은 원래의 태항아리에서 모두 바꿔친 것들이거나 다른 방법을 사용해 묻은 것이다. 당시의 태들이 온전히 묻혔는지도 의심스럽다. 태실에는 공동묘지에서 볼 수 있듯 작은 이름표 하나씩을 앞세우고 있는데 지워진 ‘쇼와’(昭和) 표시가 굴욕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삼릉 (답사여행의 길잡이 9 - 경기북부와 북한강, 초판 1997., 13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김희균, 김성철, 유홍준, 문현숙, 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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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예릉:  25대 철종과 명순왕후

효릉: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비공개)

 

전체 능역은 어마어마하게 넓었으나, 현재 마사회 종마목장 등이 들어서 있다.  제대로 공개된다면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는 왕자, 공주 묘, 태실, 폐비윤씨 희묘 등이 있다.  희릉과 예릉만 볼 수 있다는 점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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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가 중종묘를 삼성동으로 옮겨 버렸고, 자기 옆에 묻고 싶었지만 결국 태릉에 홀로 계시다니..  천하의 왕비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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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릉:  

조선 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장황제, 오른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예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장명등, 석양과 석호 일부는 중종의 구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정릉(靖陵)을 서울 강남으로 천장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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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와 어로 외에 후대에 왼쪽 길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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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수복방 자리는 복구를 하려는지 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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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묘가 선정릉으로 옮겨지면서 파묘되었다가 묻어 놓았던 석물을 그대로 썼다는 철종 임금 묘.

석물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큰 점이 특징인데 가까이 볼 수 없어서 아쉽다.  멀리서 zoom 당겨서 찍었다

 

철종장황제(재세 :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1831년(순조 31)에 경행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정조 즉위 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사건 때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후 순조는 1830년(순조 30)에 은언군의 가족을 방면하였고,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1831년(순조 31)에 철종을 낳았으나, 헌종 즉위 후에 역모사건으로 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계속 강화도에서 생활하였다가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의 명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처음에는 순원숙황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고, 1851년(철종 2)부터 친정(親政)하였다. 헌종 대에부터 시작된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였다. 그 후 1863년(철종 14)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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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뒤쪽이 의령원 (의소세손.  사도세자의 장남. 3세에 돌아가심).   앞쪽이 효창원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원)

 

 

* 효릉 (비공개)

 

인종(재세 : 1515년 음력 2월 25일 ~ 1545년 음력 7월 1일, 재위 : 1544년 음력 11월 20일 ~ 1545년 음력 7월 1일)은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로 1515년(중종 10)에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태어났다. 1520년(중종 1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의 기간을 재위한 인종은 기묘사화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를 복권시켜주었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면서 몸이 악화되어 1545년(인종 1)에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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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투어는 자연스럽게 조선왕조에 대한 역사 공부로 이어 지게 된다.  한 시대의 왕가들 이야기는 더욱 비밀스럽고도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왕이 되면 어떻고 왕후가 되어서는 무엇이 좋았으랴..  암투와 분노로 일찍 요절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왕손인데도 아기 때 죽은 사람도 있고, 반대로 남편이 왕이 되었어도 왕후 자리를 7일 밖에 지키지 못한 중종의 첫번째 단경왕후와 왕조 역사상 가장 슬픈 왕비인 단종비도 장수를 하셨으니 죽지 못하고 참고 지냈던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거의 중고등학교 시절 까지도 한반 60명도 넘던 때, 여러 개 반이 우르르 감히 왕의 무덤 위에 수백명이 떼를 지어 밥 먹고 뒹굴고 단체 사진 찍었던 무식한 기억 밖에 없었으니...   수십년이 흘러 이제야 비로소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느낌..  저렇게 찬란했던 왕의 나라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우리의 역사는 어디론지 온데간데 없었다가 이제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슬프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공부는 계속 더 해야 된다.  

오래도록 숭고하게 지키고 보존해 나가야 하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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