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 22:47

양주 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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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https://www.yangju.go.kr/museum/index.do

 

마침 왕실축제 기간 (10.1 ~ 10.2) 과 겹쳐 방문하게 되었다.  축제 분위기도 좋고, 회암사지 터가 워낙 넓어서 행사장 규모나 내용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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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는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왕실사찰이자 대표적인 선종사원유적이다. 1997년부터 2015년까지 1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약 70여개의 건물지가 발견되었으며 일반 사찰과는 다른 궁궐건축의 요소와 14세기 동아시아에서 유행햇던 선종사원의 모습이 확인되었다. 천보산 남쪽 계곡을 흙으로 메우고 석축을 쌓아 계단식으로 평지를 조성하고 총 8개의 단지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또한 궁궐에서 사용하던 용, 봉황무늬 기와, 청기와, 용두, 토수, 잡상 등의 기와류, 왕실 관요에서 제작된 도자기 등 왕실관련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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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의 창건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국 사신의 방문기록을 통해 고려 12세기 무렵에는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 나옹이 인도승려 지공의 말씀에 따라 262칸으로 중창하여 현재와 같은 규모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왕사 무학이 머무르며 태조가 자주 행차하였으며,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난 후 궁실을 짓고 머무르면서 행궁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효령대군 (세종 형), 정희왕후 (세조 비), 문정왕후 (중종 비) 등 왕실 인물들의 후원을 받아 최대의 왕실사찰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사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16세기 후반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초 일부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 이후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폐사되었던 것을 1821년(순조 21)에 지공·나옹·무학 등 세 승려의 부도와 비(碑)를 중수하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게 되었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擔條寺批禪覺王師備), 보물 제388호로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부도인 회암사지 부도(浮屠), 보물 제389호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지공선사부도(指空禪師浮居)·나옹선사부도(懶翁禪師浮屠)·무학대사비(碑)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본래의 회암사 절터인 회암사지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회암사 [檜巖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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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실의 회암사지의 유명한 유물들 중 '용두'.  장식기와. 지붕 끝을 향해 내려오는 마루 위에 놓아서 기와가 아래로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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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수; 건물 지붕의 네 모서리에 씌웠던 장식기와. 지붕끼리 만나는 부분에 위치한 목재가 비바람에 부식되지 않도록 내부가 비어 있는 사각뿔 형태로 만들어서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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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의 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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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금탁. 건물 추녀 끝에 매달았던 작은 종 모양의 금속 장식으로 몸체 아래에 걸린 구름 모양의 풍판이 바람에 흔들리면 몸체 안쪽의 부속구를 움직여 맑은 소리를 낸다.  금탁을 만들 때 제작을 후원했더 이름을 겉면에 새겼는데 명문을 통해서 무학대사, 이성계, 신덕왕후 강씨, 이방석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왕사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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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대가람 배치도. 어마어마하다. 12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유교사회를 기반으로 왕조가 이어진 조선시대에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사찰의 규모를 넘어서 거의 준 궁궐 규모였던 곳. 영원할 것 같던 권력과 위세는 덧없이 하루 아침에 티끌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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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절터의 모형과 함께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회암사지에 대한 설명을 권역별로 순차적으로 설명해 준다. 필수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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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대로 건물 공간에 대해 하이라이트 되면서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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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의 참선과 취침 공간이었던 서승당의 과학적인 아궁이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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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역할을 했던 보광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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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당의 아궁이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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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상 진영 (무학, 지공, 나옹을 그린 그림.  의성 대곡사에 원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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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잠정목록에 등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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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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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외부로 나가서 행사장 구역을 지나, 회암사지 터로.  계단을 통해 뒤로 갈수록 총 5권역별로 되어 있다. 올라갈수록 더욱 규모가 커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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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역: 1단지 제일 아래쪽의 진입계단에서부터 시작하여 4단지 문지에 이르기까지 넓은 구역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진입계단, 괘불대, 당간지주, 일주문지, 사무지, 천왕문지, 화장실, 종루지, 배수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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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15미터 거리에 있는 담장 지대석 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에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원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회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는 2주가 세트를 이루어 하나로 구성되는데 본래 2쌍으로 모두 4주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주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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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대. 기우제나 수륙제, 영산재 등 불교도들이 야외에서 지내는 대규모 법회나 의식에서 예배 대상물이 되는 괘불을 걸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하는 시설물. 괘불대에는 불화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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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지.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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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맷돌이 있는 생활권역. 제1권역 동쪽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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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의 맷돌.  맷돌의 형태가 고려시대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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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권역. 보광전지를 포함 7개소 건물지와 동서 석축단 및 배수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됨. 보광전지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일자건물지, 서쪽으로는 서승당지가 있다.   앞부분 보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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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맨 위 제5권역에 있는 사리탑. 조선전기 왕실에서 발원하여 건립한 석가모니 진신사리탑. 높이 5.89미터. 팔각의 형태를 기본으로 2층의 기단부와 원구형의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불교미술의 여러 요소를 담고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고 조선 전기 석조미술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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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위로 갈수록 계단식으로 오르면서 총 5권역으로 나뉘는데 올라갈수록 더욱 규모가 커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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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당지. 승려들의 강학이나 교선을 위한 수행의 공간. 구들이 잘 되어 있어 왕이 회암사에 머물렀을 때 수행원들이 숙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됨.아궁이는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2개소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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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에 창건되었다면 역사는 총 9백년쯤 되었을 것이다. 거의 천년의 세월도, 화려했던 전성기도, 국가의 최고 권력들에게 비호를 받았어도 그 영화로운 시간은 4백년 세월이 지나 한 줌의 재로 남았다는 상상을 해 보면 쓸쓸하리만큼 가슴 한켠도 먹먹해진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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