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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ulguksa.or.kr/bbs/content.php?co_id=history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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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료 6천원. 다른 곳들보다 더 자주 갔었고, 대표적 유적이지만 이번엔 일행들이 있으므로 가장 유명한 곳들도 방문해 보기로. 역시 어마어마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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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 앞에 설치된 돌계단 다리, 청운교 백운교. 위쪽 16단이 청운교, 아래쪽 18단이 백운교. 소계와 불국토를 연결하는 종교적 상징물의 성격을 지닌다. 이 두다리는 연화교와 칠보교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청운교에 비해 아래쪽 백운교 높이와 너비가 조금씩 더 커서 안정감과 상승감을 준다. 다리를 계단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형태로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둥근 무지개다리로 되어 있다. 이 두 다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 (75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에 전체적으로 보수하였고, 1972년에 동자주 (돌난간 중간에 세우는 짧은 돌기둥)와 난간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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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영루; 대웅전 입구인 자하문의 회랑 우측 끝에 있는 누각. 원래 이름은 우경루이며 경전을 보관하던 곳으로 보인다. 지금 건물은 1969~1973년 복원 공사 때 지은 것으로, 안에는 북이 있다. 범영루를 받치고 있는 수미산 형태의 돌기둥은 8세기 중엽 불국사가 세워졌을 때 만들어진 원래의 기둥이다. 다듬은 돌을 층별로 어긋나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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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가구식 석축: 불국사 건물 터를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 돌을 다듬어서 서로 짜 맞추어 쌇아 올린 구조물. 안양문과 자하문의 남쪽, 서쪽에 있는 석축은 앞에 있는 연화교 및 칠보교, 청운교 및 백운교와 아름다운 조화를 일룬다. 자하문과 범영루 앞의 아래쪽 석축은 밑에서부터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다듬은 돌을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범영루 아래 돌출된 기둥 밑에는 층별로 어긋나게 돌을 차곡차곡 쌓아 돌기둥을 만들었고 또 돌다리 아래는 정교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불국사의 석축은 길게 다듬은 돌과 자연 그대로의 돌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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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교 및 칠보교:  안양문 앞에 설치된 돌계단 다리. 위쪽 8단이 칠보교, 아래쪽 10단이 연화교이다.  아미타불이 거주하는 극락세계가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는 불경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웅전 앞쪽 청운교, 백운교에 비해 규모가 조금 작을 뿐 구조와 형식은 유사하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이 있다면 이 두 다리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연화교에는 계단마다 넓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에 전체적으로 보수하였고, 1972년에 동자주와 난간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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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름답고 특이한 다보탑.  일제시대 해체되어 유물이 도난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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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리만 남아 있는 사자상. 도둑 일본넘들. 우리나라 유물들 다 거기 가 있다.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알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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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깃든 석가탑 (무영탑). 도굴되었다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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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과 석가탑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여행 피크 시즌도 아닌데 이 정도. 수학여행이나 봄가을 한창일 때는 인파가 더 많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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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상륜부는 최근에 복원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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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2쌍. 보통 1쌍을 세우는데 불국사, 황룡사, 익산 미륵사 등 큰 절에 2쌍이 설치되기도 한다. 동쪽은 통일신라시대 것, 서쪽 당간지주는 서로 다른 당간지주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됨. 서쪽 당간지주 위쪽에는 홈이 있는데, 이것은 당간지주를 조선시대에 괘불을 거는 기둥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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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야경 보기 위해 월정교부터 들른다.

 

월정교: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 19년 (760)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장에 배 모양의 교각만 전해지고 있었으나 오랜 고증을 통해 누교를 복원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월정교는 길이가 60.57미터이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와 기와가 출토되어 교각 위쪽이 누각과 지붕으로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확인되었따.  동쪽 약 700미터 상류에 센 물살에 견딜 수 있도록 배 모양의 교각 뿐만 아니라, 다리의 규모와 축조방법, 석재의 색깔, 재질까지도 유사한 춘양교가 위치하고 있다.  월정교는 신라의 문화적 수준과 교량의 축조기술, 의장, 고통로 등 신라왕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문화적 품격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남천 위에 세워진 누각 다리' 월정교는 주야로 단청누교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월정교는 형산강8경으로 선정되었고 월정교와 춘양교지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457호)으로 지정 보전되고 있다.

 

https://www.gyeongju.go.kr/tour/page.do?mnu_uid=2517&chaNo=3325&cm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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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촌한옥마을:  신라 신문왕2년(682)에 설립한 신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으로 교육기관인 국학의 변화는 고려시대에는 향학,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다.  마을의 이름이 ‘교동’, ‘교촌’, ‘교리’ 등으로 불린 것은 모두 향교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촌마을 주변에는 삼국유사 속 이야기보따리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사랑을 이어준 문천교(蚊川橋)터, 김 유신이 살던 재매정, 월정교와 충담스님, 도화녀를 사랑한 진지왕, 선덕여왕이 만든 첨성대 등 수 많은 이야기 현장이 교촌과 남천을 따라 흩어져 있다.

경주교촌마을에는 최부자 고택을 중심으로 향교와 전통한옥이 많이 남아있으며, 가까운 곳에 월성, 월정교, 첨성대, 계림, 고분 등 소중한 신라유적이 있어 신라문화 속의 조선문화가 공존하는 특별한 곳이다.

경주교촌마을은 새롭게 복원 조성되어 문화유적의 원형을 잘 보존하면서도 보고 즐기는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쓰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인 월정교가 새롭게 복원되어 목조건축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고, 야간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관광객들이 꼭 찾는 야경코스가 되었다.

 

https://www.gyeongju.go.kr/gyochon/page.do?mnu_uid=2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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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댁.  경주 최씨 최부자의 종가로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최부자의 집안은 도덕적 의무와 관용을 몸소 실천해 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을 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  이 가옥은 조성 중기 무렵 최언경대에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학한 1779년 경에 건립되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전해지면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한 일자' 모양이다. 사당을 안채의 동쪽에 배치하지 않고 서쪽에 배치한 점, 기둥을 낮게 만들어 집의 높이를 낮춘 점, 집터를 낮게 닦은 점 등은 성현을 모시는 경주향교에 대한 배려로 최부자댁의 건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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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을 후하게 대접한 최부잣집. 사랑채는 항상 손님들로 넘치고, 작은 쌀통에서 쌀을 한 줌씩 집어 들고 가도록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욕심을 부려 두 손을 넣어 많이 움켜쥐면 손이 빠지지 않게 적당량을 집을 수 밖에 없었고, 쥐어 빼내는 것도 한번만 허용되었다는 작은 쌀통 이야기

 

과거는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 것,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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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있는 집' 가까운 곳으로 쉬러 들어갔는데 깔끔하고 단아한 한옥카페. 최부잣집 가족이나 친척이 운영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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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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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 (안압지) 야경은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 왔다. 보문단지내 식당. 삼겹살, 한우곱창전골 등으로 2일차 석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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