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사설 (조선일보 아침논단)

by 최유진 posted Sep 1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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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9/16/2007091600580.html당연한데 새롭게 와 닿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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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논단] 젊음도 곧 지나가리라

최인아 제일기획전무·광고카피라이터


신정아로 대표되는 거짓 학력 문제가 온통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문화계와 연예계의 여러 인사들도 비슷한 문제로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지인들은 곧 지나간다며 위로할지도 모르겠고, 당사자들은 그 말에 기대어 지금의 어려움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곧 지나가는 건 힘든 시간만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인 ‘화양연화(花樣年華)’도 한때일 뿐 곧 지나가고, 모든 찬탄의 대상인 젊음도 누구에게나 허락되지만 오래도록 지속되지는 않는 인생의 한 시절일 뿐, 결국 지나간다.

그렇다. 세월이 가면 늙기 마련이고, 누구도 나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늙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육체적인 노화 외에 질적으로 아주 다른 의미를 동반한다. 경쟁력의 저하 내지는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의미를. 사회가 온통 젊음만을 찾고 나이 듦은 곧 낡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니, 나이 든다는 건 선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연 자리에서 밀려나야 하는 것과 동의어가 되곤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남녀 차별이 엄연했던 1984년에 광고 회사에 입사해서 20여 년. 여자로 일하는 것의 봉우리를 웬만큼 넘어섰다고 생각할 즈음 다른 봉우리가 앞을 막아섰다. 나이 듦이었다. 그 어느 산업보다도 변화의 주기가 짧고 새로움을 미덕으로 치는 광고계에서, 늙는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거의 모든 대중문화를 젊음이 점령하고 젊음 그 자체가 권력이 되어 가는 마당에 젊음을 이해조차 하기 힘든 나이 든 광고쟁이의 입지는 자꾸 좁아졌다.

그래서였을까. 예전 같으면 내게 왔어야 할 일들이 후배에게 갔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일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억울했고 야속했으나 새로운 봉우리를 어찌 넘어야 할지 방법은 알지 못했다. 고민 끝에 1년을 휴직했다. 임원이, 그것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광고 회사의 임원이 1년씩이나 일을 놓는다는 것은 뒤를 보지 않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길을 찾겠다는 마음이 그만큼 절박했다.

좀 걸었다. 혹독하리만치 많이 걸었다. 생장 피드 포르라는 프랑스 국경 마을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 산티아고까지 800㎞를 걸었다. 그 길은 가톨릭 교도들의 천 년 된 순례 길이라고 했다. 3년 전 베르나르 올리비에르의 ‘나는 걷는다’라는 책에서 처음 그 길을 알았을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가 닿고 싶었다.

급한 마음에 변변한 준비도 없이 그 길에 섰다. 왜 그 먼 곳까지 날아가 고행을 하는 것인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걸었다. 아픈 무릎을 끌고 밤마다 발에 잡힌 물집을 터뜨리며 걷기를 한 달여.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친 유월의 이른 아침, 갑자기 모든 것이 확연해지면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릎 꿇고 싶지 않음이었다. 나이 든다는 것이 더 이상 무력함과 동의어가 아님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젊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찾아내고 싶었던 거였다. 실제로 그 길은 가톨릭 순례자들 외에 은퇴한 노인들이 많이 찾았다. 자신의 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일에서의 은퇴가 삶에서의 은퇴가 아님을 말이다.

“곧 지나가리라.” 우리는 이 말을 위로 삼아 어려움을 견디곤 한다. 나 또한 그랬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담하는 후배들에게도 이 말로써 위로를 건네곤 했다. 그러나 곧 지나가는 건 힘든 시간만이 아니다. 젊음도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거였다. 그러므로 한때의 젊음을 경쟁력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다. 곧 발 밑이 무너져 내리는 줄도 모르고 성을 쌓는 행위나 같으니 말이다.

나이 들어도 쉬이 없어지지 않을 자기 세계, 세평(世評)에 쉬이 무너지지 않을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나이 듦이라는 봉우리도 멋지게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이런 지혜를 깨달은 영국 시인이 있었다. 그는 인생의 오묘함을 이렇게 갈파했다. “젊기는 쉽다. 모두 젊다, 처음엔. 늙기는 쉽지 않다. 세월이 걸린다. 젊음은 주어진다. 늙음은 이루어진다. 늙기 위해선 세월에 섞을 마법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다. 나이 듦은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나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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