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27 09:01

대무신왕 이야기

조회 수 937 추천 수 8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http://kr.blog.yahoo.com/huho1223/12788
블로그 링크


<고구려 왕자들의 수난과 대무신왕>



- 역경을 딛고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

지금으로부터 2030년 전인 기원전 38년  동명성왕 에 의해 세워진 고구려, 그러나 동명성왕은 부여(夫餘)에서 탈출할 당시, 부인인 왕후예씨와 아들인 유리를 두고 왔고 이때부터 고구려 왕자들의 불운은 시작된다.
다만 광개토 태왕 비문에 의하면 동명성왕은 추모왕(鄒牟王)으로 유리왕은  유류왕(儒留王)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동부여에 있을 당시 유리는 아비없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많은 멸시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고구려 건국자인 동명성왕이라는 사실을 안 후, 그가 남긴 부러진 칼 한자루만을 가지고 왕후 예씨와 함께 고구려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동명성왕은 회복하기 힘든 병환을 앓고 있었던지, 왕위 계승을 서두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소서노와 두 아들(온조와 비류)은 사실상 국외추방당하게 된다. 온조와 비류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명성왕의 직계자손으로 보는 경향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소서노가 전남편인 우태와의 사이에서 나은 아들이라고 보는 견해가 다수의 의견이다.

  아무튼 유리왕의 태자로 임명된 지 겨우 1년만인 기원전 19년 40세의 나이로 동명성왕이 사망함에 따라, 유리왕의 왕권은 상당히 불안정 해 지게 되었다.

유리왕은 이런 불안정한 왕권을 극복하기 위해, 재위 2년에 동명성왕이 처음으로 복속한 비류국의 왕이었다가 다물후(多勿侯)로 봉해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모 드라마에서는 비류부와 고구려 왕실의 관계를 매우 대립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드라마는 상상력의 산물일뿐, 역사적인 고증이나 해석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왕비 송씨가 다음해 10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복잡한 유리왕의 가계가 전개된다.


- 태자 도절의 죽음

유리왕의 아들은 도절(都切), 해명(解明), 무휼(無恤), 여진(如津), 해색주(解色朱), 재사(再思)등 총 6명이다.

우선 재위 14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태자 도절이 있다. 당시 부여 왕 대소(帶素)는 유리왕에게 태자 도절을 볼모로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유리왕은 아직 부여와 정면대결하기엔 고구려의 힘이 부족하다가 판단하여, 이 요구에 응하기로 한다. 그런데 도절은 다소 심약한 성격이어서인지, 볼모로 잡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가기를 거부하였다.

물론 유리왕이 강제로 태자 도절을 부여로 보냈다면, 도절로써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기록에는 태자 도절이 거절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이것은 곧 유리왕의 입장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대소왕은  그해 겨울 11월에 5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범하였지만, 때마침 내린 폭설과 한파등으로 수많은 동사자를 낸체 전투한번 못해보고 부여로 물러가고 말았다.

이렇듯 기후의 도움을 받아 첫번째 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듯 싶었지만, 재위 20년 태자 도절은 겨우 19세의 나이로 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추측이긴 하지만 재위 19년 9월 유리왕도 병을 앓았던 것으로 봐서, 어떤 유행병이 있었지 않은가 싶다.  유리왕은 건장하였고 또 겨울이 시작되서 병세가 더이상 악화되지 않았지만, 도절은 어려서부터 유약하고 또 봄철이기 때문에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해명태자의 자결

  부여의 침공과 태자의 죽음으로 인해 고구려는 위협받고 왕실이 흔들리게 되지만, 유리명왕은 오히려 강력한 개혁작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우선 유리왕은 재위 22년 수도를 졸본성에서 위나암성으로 옮기고, 다음 해 제 2왕자 해명을 태자로 세웠다

해명은 도절과는 달리 매우 용맹하고 담대한 성품이어서, 그  용맹함은 고구려뿐 아니라 이웃나라에 까지 떨칠 정도였다. 이에 긴장감을 느낀 황룡국은 해명을 조롱하기 위해 왠만한 장사의 힘으로도 꿈적않는 강궁을 보내 주었다.
그러자 해명은 사신이 보는 앞에서 활시위를 당겨 강궁을 꺽어 버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유리왕은 해명 사이는 멀어지고 말았다. 부여와 매우 심각한 대립관계에 있었던 상태에서 황룡국과 불필요한 외교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유리왕이 황룡국 왕에게 태자를 죽여달라고 부탁 하였다고까지 나온다.
이 요청이 있은 지 얼마 후 황룡국은 사신을 보내 해명을 초청하였고, 이상한 낌세를 느낀 주위사람들은 만류하였지만 해명태자는 두려움없이 황룡국을 향하였다. 황룡국 왕 역시 처음에는 해명태자를 죽이려 하였지만, 그의 담대한 기세에 눌려 결국 해치지 못하고 예로써 대해 주었다.
  
이렇게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해명이었지만,  오히려 유리왕은 황룡국과 외교마찰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은 해명의 자결을 말렸지만, 해명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여진땅의 동원(東原)에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창 끝에 찔려 죽고 말았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해명태자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땅에서 장사를 지내고 사당도 세우고, 창으로 자결하였다 하여 창원으로 고쳐 불렀지만....그러나 비극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 대무신왕의 등극, 왜 神王(신왕)이어야 했는가?

해명태자가 자결하자, 유리왕은 다소 후회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를 죽게만든 영조가 그일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을 각별하게 보살펴 훗날 정조로 만든 것과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을까.... 해명태자가 사망할 당시 6세였지만, 유리왕은 제 3자 무휼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각별한 애정과 노력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해명태자가 사망한지 5개월만인 재위 28년 8월, 부여는 고구려에게 신하의 예를 강요한다. 기록에는 신하들의 항복요구를 유리왕이 받아들이려 하지만, 여섯살의 무휼이 반대하여 독립을 지킬 수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라도 풍부한 국제경험에서 나오는 외교술을 겨우 여섯살의 나이에 터득한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곧 도절 태자때와 마찬가지로 유리왕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며, 또 무휼을 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인정할만한 업적을 만들어 준 것이다.

즉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친 해명태자를 대신하여 태자에 올라야 했기 때문에, 그를 뛰어 넘을 위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재위 32년 부여의 대침공 때, 유리왕은 열살밖에 안된 무휼을 다시한번 앞세울 수 밖에 없었다. 기록에는 무휼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학반령에서 매복해 있다가, 기습 공격을 전개하여 전멸시켰다고 나온다.

하지만 열살밖에 안된 아이가, 어떻게 수만의 병력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여 배가 넘는 부여군을 전멸시킬 수 있겠는가? 결국 그 이면에는 유리왕의 철저한 계획과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누구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업적을 만들어 줌으로써,  태자 책봉의 정당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재위 33년 정월 유리왕은제 3자 무휼을 태자로 책봉하고, 이제 막 11살이 된 그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섭정체제를 단행한다.
또  8월 오이와 마리에게 병력 2만을 주어 양맥국을 정복하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탈환하는등, 무휼의 입지를 굳혀갔다.

그렇게 태자 무휼의 왕위계승은 순조로운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4년 후에 제 4 왕자인 여진이 그만 비류수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무휼의 4형제중 3명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만 것이다.


- 잘못된 판단과 선택, 비극을 자초하다

  대무신왕을 둘러싼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리왕이 재위 37년만에 사망함에 따라, 대무신왕은  서기 18년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소년왕의 탄생이다.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다물국의 왕 송양의 딸이라고만 나오는데, 아마도 유리왕 재위 3년만에 사망한 제1 왕후 송씨의 자매지간으로 보인다.

아무튼 대무신왕은 그가 성인이 되는 재위 4년에 9척 장신의 검술에 능한 괴유와 창술에 능한 마로등과 함께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참살하는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게 된다. 또 11년에는한나라의 지원을 받은 요동태수(遼東太守)의 대 침공을 격퇴하는등 고구려에 닥쳐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여 나갔다.

그런데 이 위대한 왕의 제 1왕자는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비운의  호동이다. 기록에 의하면 낙랑국에는 적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어 위기를 알린다는 자명고가 있었는데,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설득하여 이 자명고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자 호동왕자는 즉각 병력을 동원하여 낙랑왕을 항복시켰지만, 낙랑왕은 항복하기전 국가를 배신한 딸을 죽이고 만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켜가면서 까지 고구려에 충성하였던 호동왕자였지만, 대무신왕의 왕비와 뜻하지 않는 갈등을 빚게 된다.
好童(호동)이란 이름은 아주 아름답고 어려 보인다는 뜻을 갖고 있다. 기록에도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대무신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나온다. 이렇게 왕의 총애를 받던 왕자가 낙랑국왕을 굴복시키는 공까지 이루었으니, 적통인 해우의 왕위계승에 불안을 느낀 것은 당연하였으리라....

  왕비는 대무신왕에게 왕자 호동이  자신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 한다는 참소를 하고 말았다. 대무신왕도 처음에는 원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 원비가 고하며, 무고의 사실이 밝혀지면 스스로 죄를 받겠다고까지 하자 대무신왕도 호동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왕자 호동, 무고를 밝히면 예법상 어머니인 제1 왕비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해명태자와 같은 길을 택하였다.  칼에 엎드려 자결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결코 잘못된 부모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 죽는 것을 효라고 하지 않는다. 일단 화를 피해 달아나, 부모가 不義(불의)한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하는 것을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호동왕자 역시 자신의 무고가 입증될 때 까지 일단  피신하여, 부모가 자식을 죽음으로 모는 참담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 불운은 예정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 ...

호동왕자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태자 책봉을 강행하였던 해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무신왕은 재위 27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해우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무신왕의 동생  해색주가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4대 민중왕이다. 하지만 민중왕은 재위 5년만에 사망하고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여 5대 모본왕이 된다.

그러나 모본왕은 매우 성격이 포학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은 탓에 재위 초반부터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다. 심지어는 사람을 항상 깔고 앉고 베고 누우며, 혹시 움직이면 참수하였으며 간언하는 신하는 화살을 쏴서 죽였다.  이런 폭정끝에 결국 두로라는 사람에게 재위 6년만에 시해당하고 만다.  대무신왕의 가계는 겨우 2대만에 끊기고 만 것이다. 이후 고구려 왕조는 유리왕의 마지막 남은 왕자인 재사의 자손에 의해 이어졌다.

  돌이켜 보면 고구려 왕실 초기에 반복된 비극은 결코 정해진 운명이 아니었다.  해명태자야 황룡국과 외교마찰을 빚었다는 죄가 있었지만 호동왕자에겐 무슨 죄가 있었단 말인가. 대무신왕이 조금만 더 신중하게 정황을 살펴 보았다면, 호동왕자는 억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것이다.


- 고구려 건국초기 왕자들의 수난을 돌이켜 보며....

광개토 태왕릉비에는 대무신왕에 대해 대주류왕(大朱留王* 주는 상서로운 붉은색, 곧 왕의 복색을 뜻하기도 함-따라서 주류는 붉은 빛이 감돌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왕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것을 뜻함)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대무신왕은 스스로 비극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지만, 고구려 3대왕으로써 국가의 기틀을 다짐은 물론이고,  나아가 대소왕을 참살하고 주변 여러 나라를 복속시킴은 물론 한나라의 공격을 격퇴한 업적은 높게 평가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재사의 아들 6대 태조대왕은 고구려역사상 최초로 요서지역을 회복하는등 찬란한 위업을 이어갔으니, 무리한 역사적 가정은 하지 말자.

다만 해명태자에서 호동왕자로 이어지는 고구려 왕자들의 불행한 죽음을 통해, 위정자의 섣부른 판단이나 감정에 치우친 판단은 개인의 불행은 물론 물론 국가에 얼마나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되돌아 보게 한다.


---------------

http://blog.naver.com/spiritcorea?Redirect=Log&logNo=130025546336
블로그 펌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23 좋은 상사, 부하 (한국경제) 최유진 2008.12.16 949
922 [칼럼] ‘제갈공명’ 신드롬에 묻힌 고구려 역사 (프라임경제 링크) 최유진 2008.12.15 1008
921 원작, 드라마, 그리고 역사 file 최유진 2008.12.09 1092
920 앨빈 토플러 (매일경제) 최유진 2008.12.01 1110
» 대무신왕 이야기 최유진 2008.11.27 937
918 진이 롤케익 file 최유진 2008.11.22 1272
917 즐겨 보는 방송 프로 둘: 개콘 file 최유진 2008.11.18 1208
916 즐겨 보는 방송 프로 하나: 패떳 file 최유진 2008.11.18 1197
915 또 한편 1 file 2008.11.14 670
914 금주영화2편 1 file 2008.11.14 738
913 고구려 3대 대무신왕 file 최유진 2008.11.13 1392
912 노력하는 천재 김연아 file 최유진 2008.11.10 1304
911 매일 경제 사설 (20081110) 최유진 2008.11.10 898
910 커피에 대하여.. 최유진 2008.11.10 1046
909 알고나 먹자.. 최유진 2008.11.07 1250
908 닮은 꼴 (하니유머) file 최유진 2008.11.07 1191
907 마케팅의 힘 1 최유진 2008.11.07 1221
906 위대한 인물 file 최유진 2008.11.07 1019
905 이번 주 안방영화 1 file 2008.11.07 883
904 추억 속의 학창시절 1 최유진 2008.11.06 1264
Board Pagination Prev 1 ...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 77 Next
/ 77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