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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추모실과 전쟁역사실 2곳을 관람 후, 6.25 전쟁실 (1, 2)을 둘러 보기

새삼... 6.25 전쟁 연대표 등을 통해 다시 한번 짚어 볼 수 있었다.
안타깝고 슬프고 무거운 기록들..  모든 게 다 무너지고 찢긴 폐허 위에서 기적처럼 다시 일어서기 까지..  이제 전쟁 세대들이 모두 떠나면 어떤 먹먹함이 우리를 짓누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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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주요 연대표>

- 1950-
6.25  6.25 동란 발발, 북한국의 기습 남침
6.26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연합군 파병 결의 (맥아더 총사령관 유엔군 지휘)
6.28  북한군의 서울 도심 점령, 한강교 폭파
8.3   낙동강 철교 폭파.  낙동강 방어선 구축, 다부동 전투 (~8.22)
9.15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전세 역전
9.28  수도 서울 탈환
10.19  평양 점령
10.25  중공군, 제 1차 공세 개시
12.15  미군과 국군의 흥남철수작전

-1951-
1.4  유엔군 서울 철수 (1.4 후퇴)
1.5  중공군 서울 진입
2.11  서울 재탈환 및 북진
3.19  유엔군 전 전선에서 진격, 공산군 총퇴각
4.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 사령관 취임
7.10  휴전회담 본회의 개막 (개성)

-1952-
2.18  거제수용소 폭동사건

-1953-
3.29  휴전 회담 재개
4.11  이승만 대통령, 휴전반대 단독북진 성명
7.13  약 7만 공산군의 대공세, 금성전투 (~20일)
7.27  휴전협정 정식 조인, 오후 10시 전 전선에서 전투 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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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 3일  송악산 전투에서 박격포탄을 안고 직접 북한군에 뛰어들어 산화한 10용사
(박창근, 서부덕,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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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당시 한국 공군의 조종사는 단 57명 뿐이었으며 보유한 항공기도 12대의 연락기와 10대의 연습기뿐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은 육군 병기창에서 시험용으로 제작한 15kg 폭탄 247발과 경찰에서 인수한 수류탄 500여 발을 인수하여 출격하였다.
연습기와 연락기에는 무장이 없었으므로, 조종사가 낮은 고도로 비행하는 사이 뒷자리에 탑승한 관측사가 직접 폭탄을 들고 창문을 통해 떨어뜨려야만 하였다.  적 전투기나 고사포 등에 격추될 위험이 컸지만, 한국 공군은 모든 역량을 다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후 미군이 F-51 전폭기를 지원해 주기로 하자, 10여 명의 조종사가 6월 26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최단기간에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귀환한 후 7월 3일부터 출격하여 유엔 공군과 함께 제공권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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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지연시킨 6일간의 사투.
6월 28일 새벽 북한군 전차가 서울에 진입하자 육군본부는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한강의 다리들을 폭파하였다.  그러나 너무 이른 폭파로 시민은 물론 병력의 대다수가 한강 이북에 남겨지고 말았다.  국군은 소형 화기만 휴대한 채 소부대 단위로 강을 건널 수 밖에 없었다.  철수한 병력이 어느 정도 집결한 29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병력을 재편하여 영등포, 노량진, 신사리 지역에 각각 부대를 배치하였다.  북한군은 부분 파괴된 한강철교를 수리하여 전차를 건너 보내려고 하였으며, 국군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도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7월 3일 철교를 복구해 전차를 진출시키고 열차로 한강을 건저 왔다.  결국 한강 방서선은 6일 만에 붕괴되었지만, 미 지상군이 파병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을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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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국 1 군단에 배속되어 지원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하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그가 나가보니 한국군이 후퇴하고 있었고, 당시 병사들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다 한다.  그는 후퇴하는 한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B1%EC%84%A0%EC%97%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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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후의 보루, 낙동강 지구 전투
국토의 10%만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는 것은 대한민국과 유엔군의 패배를 의미했다.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낙동강 전선'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모여 함께 철저한 대비를 한 방어선이었다는 것이다.  국군과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군은 낙동강을 방패삼아 북한군을 45일 동안 막아내고 대한민국 방어에 성공했다.  이 전투 최대 격전지는 대구와 부산 수호의 요충지였던 다부동.  국군은 북한군의 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병력과 화기로 미군의 지원을 받아 매일 600 ~ 700명의 희생자를 내며 이곳을 극적으로 지켜냈고, 낙동강 곳곳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대한민국을 지키고 끝까지 사수해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고 북한군 전력의 남부 지역 집중을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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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펜을 던지고 총을 잡은 학생들.  군번도 계급도 없는, 이 땅에 뿌려진 젊은 피의 희생은 거름이 되어 우리가 밟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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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에 불리한 전세를 바꾸어 놓았던 인천상륙작전
인천의 지리적 조건이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에 제약이 많아서 미국 정부가 반대했으나, 바로 그 열악한 조건 때문에 북한군의 저지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여 큰 성공을 거둠.  북한이 부산 함락을 위해 주요 전력을 모두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 비교적 적은 피해로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 주력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어 버림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할 수 있게 해 준 역사적인 사건.  이 작전 성공 이후 3개월 만에 서울 탈환, 이후 압록강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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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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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  서로 반대 세력이 상대방이 잘못이라고 선전하면 (별다른 언론 매체 없는 시절) 많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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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인지한 사실 '망명정부'안.  
1.4 후퇴 이후 한국 정부관리, 공무원, 군인, 경찰과 그 가족 등 총 100만명을 제주도로 이주시키려고 했던 극비리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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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육탄 3용사 (강승우, 오규봉, 안영권).
1952년 10월 12일.  중공군 기관총 기지로 돌진하여 수류탄으로 산화한 용사들.  중부전선 주요 요지인 백마고지를 탈환하는데 크게 기여
2년간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38선을 기준으로 50킬로미터 정도 땅을 놓고 양보 없는 전투를 이어 갔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높은 곳의 진지를 차지하기 위해 생사를 건 치열한 전투인 고지전이 지속되었고 이 중 대표적인 전투가 열흘동안 무려 24번이나 주인이 바뀐 백마고지 전투다.  철원 북쪽 효성산에 위치한 해발 395미터의 이름 없던 이 언덕은 당시 전쟁에서 매우 중요했던 '철의 삼각지대' (철원, 김화, 평강 지대) 중 하나인 철원을 서울과 연결하는 유엔군의 주요 보급로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열흘 동안 중공군과 양측은 30만 여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고 하루 동안에도 고지 주인이 연속으로 바뀌기도 했다.  아군 3천 5백명의 피로 1만 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후 휴전협상에 큰 공헌을 해, 종전보다 휴전선을 북쪽으로 30킬로미터 위로 설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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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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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월 8일, 유엔 측은 포로들의 북환 송환여부를 당사자들의 자유의사에 맡길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철회, 공산측이 주장했던 포로교환 협정에 합의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대한 항의표시로 국군 대표의 휴전회담 참석을 거부하고 반대의지를 표명했으나 우리 주장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달 18일 미국과 사전협의 없이 반공포로 27,000여 명을 석방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휴전회담을 결렬시키기로 마음만 먹으면 유엔군과 공산군이 어떠한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그것을 얼마든지 파기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큰 사건이었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대한민국은 우리가 휴전협상 테이블의 당자국임을 미국과 중국에 재확인시켰고, 반정전 행위의 중지 조건으로 미국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합의를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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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서에 사인.  우리는 잊고 있지만 끝나지 않은 전쟁

(중공군은 1951년 봄 3차례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10만 여 명의 병력을 잃자 전쟁 완승 의지를 접었다.  때문에 당시 유엔군이 북진했다면 통일도 가능했었던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북진은 대한민국에게는 통일을 의미했지만 유엔군에게는 중국와의 전쟁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유엔군과 공산군은 각자가 패전하지 않은 상태인 휴전으로 전쟁을 결론지으려 했다.  이런 배경 아래 1951년 7월 10일부터 세계 역사상 가장 길었던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후 2년 동안 서로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할 때 마다 회담을 중지하고 전투를 재개하는 일을 반복했다.   대한민국은 유엔군의 휴전 협상 결정에 처음부터 확고한 반대를 했지만 상황은 우리 바람과는 반대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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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들이 고스란히 떠안야 할 피해...
국군은 62만명, 북한군 64만명 (전사, 부상, 실종, 포로)
대한민국 99만명, 북한 150만명 총 249만명의 민간인들이 사망, 학살, 부상, 납치, 실종
30여만명의 여인들이 남편을, 10여만명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천만명에 달하는 이들이 가족들과 헤어져 애끓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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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전치 못한 몸뚱아리 하나만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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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만 10여 만 채 이상 전국 60여 만채의 주택 파손, 4천 여 곳의 학교 시설 파괴
한반도 철도시설의 75%, 탄광시설의 50%, 공업시설의 45% 파괴
지구 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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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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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자력으로서는 헤어날 수 없었던 처참한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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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and peace are not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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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청명한 하늘과 녹음이 짙푸르고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똑같이 평화롭기만 하다.
끝나지 않은 전쟁, 그럼에도 잊혀져 가는 듯한 전쟁...
정전협정:  전쟁의 종결이 아닌 일시적으로 적대행위를 중단하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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