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5.26 14:57

고구려의 왕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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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한국의 왕' 홈페이지에서 발췌>



동명성왕 - 유리왕 - 대무신왕 - 민중왕 - 모본왕 - 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 고국천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봉상왕 -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왕 - 안장왕 - 안원왕 - 양원왕 - 평원왕 - 영양왕 - 영류왕 - 보장왕


고구려에는 모두 28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부여에서 이주한 주몽으로서 토착세력과 연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계루부를 중심으로 집권력을 확립시키면서 강력한 일원적 정치제도를 정비해 나간 것은 태조왕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태조왕 이후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대시켜 동해안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을 시도하였고 서쪽으로는 한군현과 대결하였다. 또한, 대외적인 팽창과 함께 사회가 분화되고 왕위의 부자계승도 확립되었다.

4세기에 들어, 미천왕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무찔렀으며 소수림왕대에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우며 불교를 공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명설화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건국설화인 주몽설화를 정립해 왕실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이룩된 통치체제를 토대로 고구려는 대외적인 팽창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6세기 이후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귀족들의 대립을 시작으로 귀족연립적인 정권이 등장하였고, 수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부터 고구려와 중국의 통일왕조간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오래도록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개소문의 사후 벌어진 내분까지 겹치면서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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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  동명성왕      

   동명성왕으로 불리는 고구려의 시조는 고주몽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부여의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어느 날,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웅심산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해 놓고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이 곳 우발수에 귀양보냈습니다.”

이 말은 들은 금와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여인을 데리고 와 깊숙한 방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햇빛이 그녀의 몸을 따라다지면서 비추더니 곧 임신을 하였고 얼마 뒤에 알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알의 크기가 닷 되들이 바가지만 하였다. 금와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다. 그러나, 개와 돼지가 이를 먹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이 알을 길 한가운데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그 알을 피하였다. 그리하여 또한 들판에 그 알을 버리자 새들이 모여 들어와 그 알을 품고 날개로 덮어 주었다. 금와왕이 그 알을 깨어 버려고 하였으나 깨지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그 알을 여인에게 도로 가져다 주었다. 여인이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자 마침내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알속에서 나왔는데, 매우 영특하고 준수하게 생긴 아이였다.

사내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에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났으며 활을 잘 쏘아 쏘는 것마다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 아이를 주몽이라 불렀는데, 이는 활 잘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금와왕에게는 일곱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모두의 재능에 주몽보도 뛰어나지 못하였다. 큰아들의 이름은 대소(帶素)였는데, 그가 어느 날 금와왕에게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아이이니 매우 불길한 놈입니다. 그가 더 강해지기 전에 죽여버립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금와왕은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잘한다는 이유를 들어 주몽을 죽인다면 백성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몽에게 말을 돌보는 마구간지기를 하도록 시켰다.

주몽은 마구간지기를 하면서, 좋은 말은 먹이를 적게 먹여 여위게 만들고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만들었다. 그러자, 이를 모르는 금와왕은 살찐 말만을 골라 타고 주몽에게 여윈 말을 주었다. 또, 금와왕은 사냥에 나가서 주몽이 활을 잘 쏘므로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은 활을 잘 쏘아 적은 화살로도 짐승을 많이 잡았다. 그러자, 왕자들 뿐 아니라 신하들도 주몽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 사실은 안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멀리 달아나 나라를 세우라고 타일러 말하였다. 주몽은 어머니의 말을 따라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데리고 부여에서 달아나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날 밤에 주몽은 임신중이던 그의 아내에게 반 토막의 칼을 신표로 주면서 장치 사내아이가 태어나거든 자신을 찾아오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

달아나던 주몽의 일행이 엄체수(淹遞水)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였는데, 대소의 군사들이 주몽을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러자, 주몽이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가 거의 이 곳에 당도했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몽의 외침이 끝나자, 강물에서 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이들이 건널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주몽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다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들을 뒤쫓던 무리들은 결국 주몽을 잡지 못한 채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금와왕의 압박에서 벗어난 주몽 일행은 졸본부여의 영토인 모둔곡(毛屯谷)이라는 험한 요새에 터를 잡고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세력이 어느 정도 커진 이후에 주몽은 담판을 짓기 위해 졸본부여의 왕을 찾아갔다. 졸본부여왕 연타발(延陀勃)은 이미 대세가 주몽에게로 기운 것을 알고는 자신의 딸을 주몽에게 주며 사위로 삼고 나라를 주몽에게 넘겨 주었다.

주몽 일행은 모둔곡에서 베옷 입은 사람과 장삼옷 입은 사람과 마름옷 입은 사람을 만나 이름을 물으니 그들은 각각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라 대답하였다. 그러자 주몽은 이들에게 극씨(克氏), 중실씨(仲室氏),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주고 함께 나라를 세우자며 졸본천으로 데리고 갔다. 졸본 땅은 기름지고 아름다우면서 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직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상류에 집을 짓고 살면서 나라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이 때, 주몽의 나이 22세로, 한 효원제 건소 2년(기원전 37년)이었다.

즉위한지 4년째에 주몽은 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 그리고 즉위 6년에 오이와 부분노를 시켜 태백산의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정복하도록 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즉위 10년인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 지방을 병합하고, 즉위 14년에는 주몽의 생모인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사망하였다. 주몽은 친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부여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즉위 19년인 기원전 19년에 동부여에서 유리왕자가 어머니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해 왔다. 그러자, 주몽은 졸본에서 태어난 비류와 온조를 제치고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하여,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세웠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주몽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니 이 때의 나이 40세였으며 장지는 용산(龍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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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대) 광개토대왕

광개토왕은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375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이라 전하고 있다. 고국양왕 재위 3년인 386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고구려 19대왕으로 등극하였다. 재위기간 동안에는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나면서부터 기개가 웅대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고 한다.

광개토왕의 치적은 광개토왕릉비나 『삼국사기』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그의 시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재위기간 동안의 가장 큰 업적은 영토 팽창에 주력하여 고구려의 세력권을 확대시켰다는 것에 있다.

392년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남쪽으로는 백제 정벌을, 북쪽으로는 거란 정벌을 감행하였다. 특히 백제정벌에 큰 힘을 기울여 석현성을 비롯한 10개성을 함락시키는가 하면 같은해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관미성을 20 여일 만에 함락시켜 백제와의 전쟁에 불을 붙였다. 이에 백제는 394년과 395년에 영토탈환을 위해 침공하였으나 각각 수곡성과 패수에서 고구려군에 게 밀려 퇴각해야했다. 이처럼 백제의 침입이 계속되자 광개토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여 396년 마침내 한강 너머 백제의 도성에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이 한강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백제는 뒤늦게 군대를 도성에 집결시켜 고구려군을 막아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제의 아신왕은 화친을 제의하였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영원한 노객(奴客)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고구려는 이 전쟁을 통해 한강 이북의 58성 700촌을 고구려 영토 내에 편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백제 왕족 및 대신을 볼모로 얻는 등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아신왕은 영토 회복이라는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군대를 증강하고 성을 쌓는 등 대고구려전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켰으며 397년 왜에 구원병을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399년 왜는 백제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에 파견하여 왜를 물리치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하여 왜 세력을 완전히 궤멸하였다. 신라 공략에 실패한 백제는 이후 다시 왜와 함께 고구려 영토인 대방고지 공격에 나섰으나 역시 실패하고 만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광개토왕은 요동지역에 눈을 돌려 적극적으로 서방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400년 후연의 왕 모용성이 고구려왕이 무례하다하여 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땅을 침입한 데서 본격화되었다. 후연은 이 선공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고 주변 700여리의 땅을 넓혀 5천여호를 이주시킨 뒤 돌아갔다. 이에 광개토왕은 402년 숙군성을 공격하여 평주자사 모용귀를 도망치게 했고 404년 재차 후연을 침공하였다. 후연 역시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여 405년과 406년에 각각 요동성과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후연과의 전쟁을 통해 요동지역을 확보한 고구려는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과 우호 관계를 맺음에 따라 서방 진출을 일단락 짓는다.

광개토왕은 이 외에도 거란의 일부로 추측되는 비려, 숙신, 동부여를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이러한 왕성한 정복활동을 통해 광개토왕은 재위기간동안 서쪽으로는 요동을 확보하고 시무라렌강 유역까지 원정을 나갔으며, 동쪽으로는 목단강 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일대,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한편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광개토왕은 대외 정복사업뿐만 아니라 평양에 9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적극 권장하고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관직을 신설하여 체제 정비를 도모하는 등 내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광개토왕의 내정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광개토왕릉비에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는 기록에 있어 광개토왕이 단순한 정복군주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은 413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국강상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하였다. 414년 능에 옮겨 묻고 능비를 세웠는데 능과 능비는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남아 있다. 광개토왕릉에 대해서는 장군총설과 태왕릉설이 갈라져 있었으나 태왕릉의 분구 정상부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구(願太王陵安如山固如丘)라고 양각한 명문전이 발견되어 대개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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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대) 장수왕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장남으로 394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이다. 광개토왕 재위 18년인 409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413년 광개토왕이 죽자 고구려 20대왕으로 등극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장수왕은 신체가 크고 기개가 호탕하였다고 한다.

장수왕은 재위기간 동안 이원외교를 통해 이민족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정국을 안정시키는 한편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장수왕이 즉위할 당시 중국은 여전히 여러 이민족들에 의해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위가 하북지방의 새로운 맹주로 등장하면서 5호 16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즉 439년 화북지방이 북위에 의해 통일이 되고 화남지방에 동진(317-420), 송(420-479), 제(479-502)가 들어서면서 남북조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장수왕은 이러한 중국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이원외교를 펼쳤다. 먼저 즉위원년인 413년 동진에 사신을 보냈고 동진왕 안제는 장수왕을 고구려왕 낙랑군공으로 봉하였다. 동진에 이어 차례로 들어선 송나라와 제나라에 대해서도 동진과 같은 외교정책을 폈다.

425년과 435년에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북위왕 세조는 장수왕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고구려와 북위는 436년 풍홍소환 거절 및 466년 혼인요청 거절 문제로 한때 긴장이 고조된 적이 있었고 440년부터 461년간 사절 교환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는 472년부터 북위에 매년 2차례씩 사신을 보내고 공물도 두배로 늘이는 등 북위와의 관계에 있어 각별히 신경을 썼는데 북위도 이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었다.

고구려에 대한 북위의 대우는 『삼국사기』장수왕 72년조(484)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북위에서는 고구려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들의 숙소를 두는데 제나라 사신 첫번째로 고구려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제서』에는 489년 북위에서 남제의 사신을 고구려 사신과 같은 자리에 배치했다는 기사가 있어 사실상 고구려를 제1의 주변국가로 대우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수왕은 북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과도 외교적 관계를 맺었다.

한편 장수왕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를 위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천도 이후 보다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시행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에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와 백제가 433년 동맹을 맺자 고구려는 454년, 468년, 481년에는 신라를 455년, 475년에는 백제를 각각 공격하였다. 특히 475년에는 승려 도림을 이용하여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킨 뒤 친히 3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여 백제의 도읍,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개로왕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장수왕대의 고구려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동지방, 동쪽으로는 목단강 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일대, 남쪽으로는 한강 이남의 충청도와 경상북도 일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장수왕은 491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나라 효문제는 이 소식을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를 지어 입고 동쪽 교회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알자(謁者) 복야(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장수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태부(太傅)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추증 책봉하고 시호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북위가 이민족에게 수여한 추증 중 가장 높은 것이었다고 하니 북위의 장수왕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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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대) 보장왕  

보장왕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며, 이름은 장(臧, 藏) 혹은 보장(寶臧, 寶藏)이었다.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왕(太陽王)의 아들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하여 영류왕(榮留王)의 뒤를 이어 제28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643년(보장왕 2년)에는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에 도사(道士)를 요청하는 등 도교진흥책을 썼다. 당시 도교의 수용에 대해 불교세력은 심하게 반발하였다. 당에서 도교를 수용한 것은 도교를 믿는 당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한 의도와 한편으로는 연개소문의 집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즉위 초기에는 당과는 표면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신을 교환하고 당으로부터 책봉(冊封)을 받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 태종(太宗)은 고구려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과의 긴장은 높아갔다.

한편 신라와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여 신라를 자주 공격하였다. 반면 백제와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왜(倭)와의 관계를 재개하여 신라를 압박하였다. 고구려 및 백제와 적대적 관계가 된 신라는 당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에 당은 신라를 지원하면서 삼국의 문제에 개입하였는데, 특히 고구려에 대해서 신라침공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의 요구를 거부하고 당의 사신을 가두어 버려 마침내 당과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당 태종(太宗)은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고구려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645년(보장왕 4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요동지역의 많은 성을 장악한 당군은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참패하고 철군하였다. 이후 당은 전술을 바꾸어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를 자주 공격하였다. 당은 당 태종이 죽은 649년(보장왕 8년) 이후 잠시간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멈추었다.

그러나 당 고종(高宗)은 고구려 정복의 의지를 불태웠다. 한편 고구려 역시 654년(보장왕 13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하였고 655년(보장왕 14년)에는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다. 655년(보장왕 14년)부터 다시 당과의 싸움이 벌어지고 백제가 멸망한 660년(보장왕 19년) 에는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후 당은 군사력을 백제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하였기 때문에 잠시 고구려와 싸움은 벌이지 못했다. 그러나 665년(보장왕 24년) 연개소문이 죽고 666년(보장왕 25년) 연개소문의 자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급기야 장남 남생(南生)은 당나라에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났다. 이에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다시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당과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각지에서 분전했지만 패배를 계속하였고 마침내 668년(보장왕 27년) 9월에는 평양성 마저 함락 당하여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그 후 보장왕은 당나라로 잡혀갔고, 정치의 책임이 왕에게 없다고 하여 당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되었다.

그 후 677년에 요동지방을 다스리는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 朝鮮郡王)으로 임명되어 고구려유민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왔다. 당은 보장왕으로 하여금 고구려 유민을 안정시키려 하였지만, 당의 기대와는 달리 보장왕은 고구려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부흥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자 681년 공주로 유배되었고 682년경 사망하였다. 죽은 뒤 장안(長安)으로 운구되어 돌궐의 가한(可汗)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힐리의 무덤 옆에 장사되었으며,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되었다.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C1%DF%C7%D0%B1%B3/2%C7%D0%B3%E2/%BB%E7%C8%B8/1%C7%D0%B1%E2/ms20030108150559/web/%B0%ED%B1%B8%B7%C1%BF%D51.htm  (퍼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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