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26 11:09

관미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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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에 나오는 '관미성'에 대한 학설이다.  식민사관이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
중국애들이 동북공정으로 촬영을 불허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중국에서 방영되면 안된다.
삼국이 한반도가 아닌, 하북성쪽에서 발원되었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기 땜에 자칫 동북공정의 구실에 박차를 가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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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였다는 백제의 관미성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A.D.392) 조를 보면,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해수로 둘러져 있기 때문에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지 20일 만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 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본기 아신왕 2년(A.D.393) 조에는,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인데 그 성이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다. 이를 과인이 통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다. 그대도 애를 써서 설욕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군사 1만으로서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북쪽 변경에 있었다는 관미성에 대한 위치논쟁이 시작되었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한 주장들은 대개 네 주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관미성의 위치가 고구려의 남쪽, 백제의 북쪽 국경에 위치했고, 사면이 높은 절벽이며, 물로 둘러져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이 성이 섬에 위치했을 것이므로 관미성이 한강하류인 강화도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관미성강화도설이 있고, 둘째는 이때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임진강이나 예성강보다 더 북쪽이었고, 백제가 황해도 남부정도까지는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관미성이 요충지라 했고, 성의 특성상 삼면은 물로 둘러져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한 면은 육지와 접해 있었을 것이므로 관미성이 바다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곶(串)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관미성장산곶설이 있으며, 셋째는 기록에서 해수(海水)라고 기록한 것은 실제 바다를 말한 것이 아니라 강을 말하는 것이고, 강물이 구불구불 흐르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했던 것이고,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임진강 중류정도였을 것이기 때문에 관미성이 지금의 경기도 연천, 전곡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관미성연천전곡설이 있고, 넷째는 관미성이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의 난하 중류인 반가구수고 부근에 위치했다는 필자의 관미성난하반가구수고설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 외 경기도 파주오두산성설, 중국 황하부근위치설 등이 있다.

관미성강화도설은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을 북한의 평양부근에 위치했을 평양동황성으로 생각하고, 이때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타고 내려와 황해도 해안을 경유하여 한강 입구에 있는 강화도를 공격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며, 이를 교두보로 하여 서기 396년(호태왕 비문의 영락 6년 병신년 조)에 한강을 타고 올라와 백제 한성(현 서울)을 포위함으로써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백제의 도읍이 지금의 서울이었다면 강화도가 한강에 진입하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요충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강화도를 백제의 북쪽변경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으로 남게 된다.
관미성을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는 주장들의 기본적인 역사관은 삼국 역사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역사해석의 치명적인 걸림돌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실제 우리의 고구려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赤城: 졸본) 부근에서 건국되어 북경 북쪽 탕하구(국내위나암, 국내성), 북경 창평(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후일 승덕시 열하행궁(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적성 부근이 졸본이고, 열하행궁이 평양성이다.
백제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천서에서 난하를 건넌 그 북쪽 부근에서 건국되어 온조왕 14년 정월에 강 남쪽의 천서(遷西)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 천서가 하남위례성 즉 한성이다.
그리고 신라는 하북성 진황도시 산해관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그 곳이 신라의 천년도읍 금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를 우리 고대역사의 중심 강역으로 보고 삼국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관미성장산곶설 역시 백제의 국경을 약간 북쪽으로 올려 비정한 것일 뿐 관미성강화도설과 흡사한 주장이다.
기본적으로 백제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고 하는 인식이 잘못되었다.



☆ 삼국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닌 하북성 난하 부근이었으나 광개토대왕 때 한반도에도 고구려가 진출해 있었고, 반도백제가 365년경 건국되어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있었으나 이때 고구려와 반도백제의 국경이 어디였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관미성연천전곡설 역시 백제의 건국지를 서울로 보고 관미성이 백제 북쪽변경의 요충이라 했으므로 서울의 북쪽인 연천, 전곡부근에 위치해야 방향이 맞고, 전곡 부근은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전곡을 통과해 서울을 향하여 침공해 들어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에 관미성이 위치했을 것이므로 기록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부근에서는 사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성다운 옛 성을 찾을 수 없다.    

  관미성난하반가구수고설은 필자가 주장하는 설로서 고구려의 평양성이 한반도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이고, 백제의 도읍 한성이 하북성 당산시 천서 임을 밝혔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난하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천서를 지나고, 대흑정수고를 지나면 그 북쪽에 만리장성이 난하를 끊고 동서방향으로 지나는데, 바로 그곳에 엄청나게 큰 천연호수인 반가구수고가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반가구수고 부근이 옛날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으로서 백제의 북쪽 변경에 해당하며, 지형이 매우 험준한 산악지형이다.
  그리고 산맥이 반가구수고까지로 이어져 수고 안까지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이 여러 군데 있고, 난하가 구불구불 흘러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곳들도 많아 관미성은 바로 이 반가구수고 주변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고, 그 부근에는 실제 옛 성터들도 많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관미성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당 태종이 직접 군사들을 인솔하고 고구려를 치기 위해 출전했던 기록 속에 관미성과 유사한 지형에 축성되어 있던 비사성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 보장왕 3년(A.D.644) 11월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육군은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을 삼아 보·기병 6만으로 편성해 요동(현 북경 서북쪽 장가구시 선화 부근)을 경유하여 유주로 향하게 하고,  
  수군은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4만3천명의 군사와 전함 5백 척으로 내주(현 산동반도 내주시 부근)를 출발하여 평양(승덕시 열하행궁)으로 향하게 하고,  
  당 태종 본인은 정주(定州)에 이르러 직접 이끄는 군사들을 전시체제로 바꾸어 고구려 정벌 길에 나서 요동을 향해 진군하게  된다.
  그리하여 645년 4월 수군을 이끄는 장량은 동래(산동반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게 되는데, 성의 사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으며, 5월에 이르러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명이 여기에서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지금 중국에서는 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대련의 대흑산산성을 비사성이라 하며 그곳의 성문 위에 비사성이라고 새긴 돌판까지 붙여 놓았고, 우리 학자들도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상식대로 당 태종 때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수군의 장량이 산동반도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평양을 향하여 간다면 발해해협을 건너 꼭 요동반도의 대련에 상륙할 필요 없이 그대로 항해하여 압록강 하구쯤에 상륙하거나 대동강 하류 또는 그대로 대동강을 타고 올라가 평양부근의 적당한 장소에 상륙하는 것이 전술적으로도 유리하고 공격거리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수많은 군사를 죽여가면서까지 반드시 비사성을 함락시켜야 만 했다. 이는 그곳 비사성을 통과하지 않으면 평양성으로 가는 다른 길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비사성의 지형적 특성과 관미성의 지형적 특성이 아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데, 이때 장량은 지금의 산동성 내주(동래)에서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발해를 건너 난하(패수)를 타고 올라가 육군과 함께 합류하여 평양성(현 승덕시 열하행궁)을 공격하려 했다.
  그리하여 난하를 타고 올라가 고구려의 남쪽 국경인 지금의 반가구수고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 비사성이 있어 그를 함락시키지 않으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사성과 관미성은 함께 반가구수고 주변에 위치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혹시 원래의 백제 관미성을 고구려가 빼앗아 성의 이름을 비사성으로 바꾼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관미성과 비사성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반가구수고 동편으로는 사면이 절벽으로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상륙해야만 그나마 오를 수 있는 옛 성터의 흔적이 있는데, 성의 서쪽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장소이며, 이곳이 곧 관미성이요, 비사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백제의 관미성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성으로서 지금 중국 하북성 난하 중 반가구수고에 있었다.
            

http://blog.daum.net/3002kumsukangsan/359939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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