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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5. 19 ~ 5. 20

산악회 5월 모임 영주.

17년 5월 소백산 둘레길 때 좋은 기억으로 18년에 또 오기로 했었단다.

이번에는 트레킹 안하고 부석사 등 관광 위주로.  선비촌에서 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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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일찍 출발해서 영주역 근처 '만당해장국'에서 아침식사. 소고기국밥식으로 얼큰하게 나오는 이런 해장국류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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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반 무섬마을부터.  영주 외곽 남쪽이라 먼저 방문하는 것이 좋다

http://www.무섬마을.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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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 다리 건너기.  이 때 날이 살짝 흐리고 생각보다 나무 다리 폭이 좁고 밑에 보다가 그대로 빠질 듯한 착각 ㅜㅜ  동균이 뒷섬 꽉 쥐고 밑에만 보고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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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원래 이름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동쪽 일부를 제외한 3면을 휘돌아 흐르고, 내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풍수지리학상으로는 매화 꽃이 피는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이라 하여 길지(吉地) 중의 길지로 꼽힌다. 이곳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으로 여겨진다. 반남박씨(潘南朴氏) 입향조(入鄕祖)인 박수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뒤,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김씨(宣城金氏) 대(臺)가 영조 때 다시 무섬에 들어왔다. 이 무렵부터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세거(世居)해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모두 48가구(2004)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가옥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고, 16동은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져 있고, 안동 하회마을과 지형적으로도 비슷해 천혜의 자연조건을 자랑한다. 하회마을과 달리 일반에 그리 알려지지 않아 옛 선비고을의 맛을 흠씬 맛볼 수 있는 것도 무섬마을만이 가진 특징이다. 문화재도 많아 김규진가옥(金圭鎭家屋), 김위진가옥(金渭鎭家屋), 해우당고택(海遇堂古宅), 만죽재고택(晩竹齋古宅) 등 9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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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죽재 고택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다. 반남박씨(潘南朴氏) 판관공파(判官公派)의 종가(宗家)이자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조선 현종 때 박수(朴檖)가 무섬마을에 입향하면서 지었으며, 당호(堂號)는 원래 마을의 옛 명칭인 섬계(剡溪)를 따서 섬계초당이라고 하였으나 후대에 중수(重修)하면서 만죽재(晩竹齋)를 사용하고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모양의 안채와 '일(一)'자 모양의 사랑채가 합쳐져 'ㅁ'자 모양을 이룬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에 대청 3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상방 1칸, 고방 반칸, 문간 반칸이 연달아 놓여 있다. 문간은 안마당 쪽으로 벽체 없이 개방하고 서쪽에 널문을 달아 옆마당으로 통하게 하였다. 중문 좌측은 사랑채 부분으로 전면은 낮은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툇마루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기단은 시멘트 모르타르로 상면을 마감하고 그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았다. 기둥은 안대청 전면과 사랑채 툇기둥만 둥근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안대청 상부가구는 간결한 3량가(三樑架)이고 사랑채는 5량가(五樑架)이다. 지붕은 사랑채 부분만 독립된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얹었다. 마을의 고가들이 대부분 대문 우측에 사랑이 있으나 이 집은 좌측으로 독립된 사랑을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죽재고택 [晩竹齋古宅]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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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영주시내 '랜떡'  얼마나 고대했었는지..

생활의 달인 이후 바글바글.  바로 왼쪽 집이 아니고.  이 집.  랜드로바가 이 집 때문에 이사를 못 간다고.  랜드로바는 장사 안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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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묘한 맛. 재래식 고추장의 살짝 은근 매운 기에, 굵은 가래떡, 물오뎅 얹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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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순흥리 벽화고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9380&cid=46620&categoryId=46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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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리 1호분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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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가는 길 애플핀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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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선비촌' 도착

http://www.sunbichon.net/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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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일) 아침 기상해서 선비촌 모습.  7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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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암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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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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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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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관람

부석사는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이 문무왕의 명을 받들어 창건했다.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서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이다. 또한 원효대사가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증명하듯 부석사 조사당에 의상소상과 원효진영과 선묘진영이 봉안되어있다.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676년에 의상은 태백산(太伯山)에 돌아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고 『화엄경』의 가르침을 펼쳤다. 한편 선묘룡은 항상 따라다니며 의상을 지켰다. 그때 도적의 무리가 부석사 터에서 자리를 잡고 방해하므로 곤경에 처하자, 선묘룡은 허공에서 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해 도적들의 머리 위로 둥둥 떠다녔다. 그제야 도적들이 겁을 먹고 의상에게 귀의하였다. 그 바위가 지금도 부석사의 부석(浮石)으로 남아 있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 조사당(국보 19),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 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조사당에 있던 제석천, 범천, 사천왕상의 벽화는 지금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부석사(浮石寺)의 조사당(祖師堂) 추녀 밑에 일명 선비화(禪扉花)라고 불리는 콩과 낙엽관목인 골담초 한 그루가 있다. 『택리지』에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나무가 바로 선비화이다. 2009년인 아직도 여전히 살아있는 채로 남아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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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당간지주

 

현재 부석사 경내에 1m 간격을 두고 동서로 상대하여 서 있는 지주로 정상부에는 2단의 유려한 원호가 비스듬히 조각되어 있고 옆으로 세 줄의 종선문대가 장식되어 있다. 간을 고정시키는 구멍은 윗부분에 장방형의 간공을 하나 마련하였을 뿐이다. 특히 당간지주의 아랫부분인 지면에는 간대석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 대석은 원좌로 되어 있으며 주변을 연화의 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소박 미려한 지주이다. 간결하고 단아한 수법은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보게 한다.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당간지주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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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삼층석탑:  이 탑은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한 것으로 동탑의 높이는 3.6m, 서탑의 높이는 3.77m이다. 양탑 모두 원위치가 아니고 부석사 동쪽 200m 지점에 있는 이름 모를 사지에서 1966년 현위치에 옮겨 세운 것이다.

불사리탑 이건비에 의하면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오층탑으로부터 석존사리 5과를 분안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방형 지대석 위에 얹혀 있는 하층 기단면석에는 우주와 일주식의 탱주를 나타내었고 하층기단 갑석 위에는 4분원 몰딩의 괴임이 있다. 상층기단 면석에도 우주와 일주씩의 탱주를 모각하였고, 상층기단 갑석 밑에는 부연이 있으며, 위에는 옥신을 받는 괴임을 마련하였다. 상륜부는 없어졌는데 지금 놓여져 있는 것은 뒤에 보충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삼층석탑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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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문에 올라.  문 사이로 무량수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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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국보 18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서 신라 문무왕(661~681)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이다. 그후 소실된 것을 고려 현종(1009~1031) 때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다시 불에 타버려 우왕 2년(1376)에 재건하였고 조선 광해군(1608~1623) 연간에 단청하였다.

이 건물은 주두와 소로의 굽은 각각 약간 안으로 깎여 휜 곡선을 이루고, 굽받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가구는 직선재를 사용하였고 장식적인 요소가 적으며 공포, 가구의 수법도 견실하다.

1916년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묵서명에 우왕 2년(1376)에 재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수법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현존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주심포양식의 기본수법을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의 하나이다. 전내에는 무량수불인 아미타여래를 봉안하였는데 다른 불전에서와는 달리 불전 측면인 서쪽에 모시고 있으며 조사당의 벽화를 옮겨 보존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무량수전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무량수전 앞 석등: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 석등이다.

방형 기대석 측면에는 안상이 2개씩 배치되고, 기대석 위의 팔각하대석에는 복련과 귀꽃 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팔각의 간주석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간주석 위의 상대석에는 부드러운 8엽 앙련이 조각되었다. 팔각의 화사석 벽면에는 네 곳에 화창이 있고 네 곳에 세련된 보살상이 조각되었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가 있었는데 보주대만 남아 있다.

석등의 전체 높이는 2.97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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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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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앞마당에서 소백산 자락을 바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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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625~702)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건립되었고,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되었으며 동 24년(1493)에 개채되었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에 맞배집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기둥의 배흘림이 약해졌고, 주두와 소로의 굽은 직선이며 굽받침이 없고, 공포와 가구의 수법은 간략하다. 구조양식으로 보아 무량수전보다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 입구 좌우에 제석천, 범천, 사천왕상의 벽화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려시대의 회화사상 희귀한 것이며, 고분 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로서 지금은 무량수전내에 보존하고 있다.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국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조사당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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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1543년(중종 38)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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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안향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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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지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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