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05 13:58

‘징비록’ 이순신의 역사 속 실제 최후 어땠나 “죽은 순신이 산 왜적 물리쳤다”

[뉴스엔 김형우 기자]

종영한 KBS 1TV '징비록'이 이순신(김석훈 분)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그려냈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앞장서 싸우다 적탄을 맞고 쓰러진 이순신의 최후는 보는 이들의 눈물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과연 역사 속 이순신의 최후는 어땠을까.

●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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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1년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다. 이 밖에도 조선왕조실록 징비록 행록 등 이순신의 행적을 담은 역사서에는 이순신의 최후가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류성룡의 책 징비록 속 이순신의 최후를 보자. "적을 추격해 남해 경계에 이르렀는데 이순신이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싸우던 중 적탄이 날아와 가슴에 명중하여 등 뒤를 관통했다. 좌위에서 그를 부축해 장막 안으로 옮겼고 이순신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고 한뒤 숨을 거두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이충무공전서행록 등의 기록도 이 징비록과 매우 유사하다. 이에 따라 일부 역사가들은 후대에 기록된 선조수정실록이나 행록이 징비록의 글을 참고해 작성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난중잡록은 이순신의 마지막 모습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올라가 추격하며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 이순신을 일제히 쏘았다.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됐다. 급히 좌장들에게 명해 방패로 신체를 지탱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비밀로 해 발상하지 못하게 했다"며 "이때 그 아들 이회가 배에 있다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북을 울리며 기를 휘둘렀다..." 난중잡록과 징비록 조선왕조실록 행록과 다른 점은 이순신 사후 독전한 장수가 조카 이완이 아닌 아들 이회라는 기록이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유언으로 유명한 이 같은 최후 묘사와는 다소 다른 기록도 있다. 안방준이 쓴 '노량기사'는 다른 기록과는 큰 차이가 있다. '노량기사'는 군관 송희립이 먼저 탄환에 맞았고 이순신이 놀라 일어나다 겨드랑이 밑에 조총 탄환을 맞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병사들이 이에 고함을 질렀고 송희립이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 뒤 이순신의 갑옷을 입고 지휘를 했다고 묘사했다.

안방준의 '노량기사'에 따르면 이미 대장선에 타고 있던 일부 병사들이 이순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숨기려 한 것도 이순신 본인이 아닌 송희립이 된다.

이와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는 야사 기록이 있는데 바로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의 말이다.

야사인 '자해필담'에선 진린은 전투 중 이순신의 죽음을 알아차렸고 말한다. "진린이 적의 머리를 베려 다투는 조선군사들을 보고 '통제사가 죽었구나'라고 한탄했다. 주변에서 이유를 물으니 "통제사는 군율이 매우 엄격했는데 그 배에서 군사들이 군공을 다투며 어지러운 것을 보니 이는 호령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종합적으로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 일부 의견이 엇갈리는 것 사실이다. 특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해선 논란도 있다. 유언이 기록된 사서들이 모두 '징비록'의 내용을 차용한 흔적이 강하고 '징비록' 이전 기록엔 유언 기록이 없다는 점이 그 이유다.

●"백성들도 군사들도 모두 통곡,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최후에 대한 묘사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장렬하고 비장하다는 점이다. 최후의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한 영웅의 비장함은 모든 기록에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이 죽은 뒤의 모습들을 보면 이순신의 존재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명수군제독 진린은 자신을 구해준 이순신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려 갔다가 뒤늦게 죽음을 알고 놀라 의자에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했다. 드라마 '징비록'에선 진린과 이순신의 사이가 다소 험학하게 나오지만 실제론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진린은 이순신을 향해 '노야' 즉 '어르신'이라고 호칭하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이순신에게 조명수군 지휘권을 넘겨주는 파격적인 모습도 보인다. 상국이라며 조선을 낮게 바라보던 명나라 입장을 감안하면 그 놀라움은 더 한다. 진린은 이후에도 선조에 장계를 수차례 올리며 이순신의 공적을 치켜세웠다.

백성들과 군사들의 슬픔은 더했다. 명나라 군사들마저 이순신의 죽음에 울음바다가 됐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군사와 중국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마다 통곡했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를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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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BS 1TV '징비록' 캡처)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5080311331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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