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by 최유진 posted Aug 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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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포유적:  이순신영상관, 이락사, 첨망대

 

http://tour.namhae.go.kr/02theme/03_06.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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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를 둘러 보고, 관음포 충무공 전몰 유허지로 이동.  남해 바래길 중 '이순신 호국길' (충렬사 ~ 관음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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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음력 11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을 끝내고 일본으로 도망 가려던 왜군을 끝까지 쫓아 (노량해전) 무찌르다가 돌아 가신 곳 관음포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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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관 옆 '이락사' (충무공의 영구를 맨 먼저 육지에 안치했던 곳) 로 가는 길.  영상관 먼저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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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영상관.  독특한 외관 모습을 하고 관음포 앞바다를 마주보며 위치해 있다.  어른 3천원 / 학생 2천원 (영상 관람 포함)

http://tour.namhae.go.kr/02theme/03_06_02.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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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k를 통해 입장을 하면, 건물 2층이 된다.  관음포 앞바다를 바라 보며 통큰 유리창이 되어 있다.

연세 드신 해설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또다시 귀한 시간을 보냈다.  통 유리창 앞에서 한참을 설명 들었다.  관음포 바다를 바라 보면 비장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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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유언,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전방급 신물언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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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섬사수 사역무감 (적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나이다)  마지막 전사지 노량해전을 앞두고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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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 대첩..  연전연승..  참 말만 쉽기도 하다.  되돌 릴 수 있는 운동 경기도 아니다.  빼앗기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숫적 열세를 안고 몇배나 되는, 육지에서 칼과 창으로도 어렵거늘, 바다 위에서 달아 날 곳도 없이 목숨을 내놓고 싸운다.  그리고 이겼다.  

정신력 하나 만으로 죽기 살기로 되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시도는 해 볼 것이다.  김훈 작가가 '명량해전' 재현 행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승리 전략과 메세지를 '과학적 사실주의'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 산하 모든 것을 무기로 삼고 치밀한 전략을 세운 것.  요즘 젊은 세대들은 좋다 마음에 든다 안든다 감성적으로만 대할 뿐, 사실을 취급하는 방식에 따라서 (무수히 많은 사실 들 중) 어떤 것을 취하고 버리고에 따라 개인사도 나라의 존망도 달라 질 수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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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5627&cid=40942&categoryId=37404

난중일기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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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즉생 필생즉사

 

김훈 '자전거 인생'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이순신의 적은 우선 일본 군대가 아니라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저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달아나는 부하들은 붙잡아 놓고 그 대안 없음을 가르쳤다.  이 아수라 속에서 살길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싸우다 죽든지, 달아나다 죽든지, 군율에 죽든지 죽음의 방식만이 선택의 길이다.  명량은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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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로 나가서 이락사와 첨망대를 먼저 둘러 본 후 다시 1시 30분 이순신 장군 영상관으로.  여기가 1층이며, 위쪽 관람층은 2층이 된다.

영상은 노량해전의 격전 모습을 입체 영상으로 보여 준다.  충무공의 아들이 돌아가시는 장면과 어머니의 꾸지람이 상상으로 보이는 모습에선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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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장의 유명한 명언이라는데..  차를 같이 마시고 싶다니 >.<  건방진 넘

징비록과 충무공의 전술을 분석해서 수백년 후 일본은 다시 쳐들어 와서 빼앗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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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락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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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에서 섬의 한가운데를 향해 4㎞들어오면 사적 제232호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가 자리잡고 있다. 일명 '이락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유해가 맨처음 육지에 오른곳이다. 이락사 앞 뜰에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유언비가 역사를 증명하듯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있다. 이락사가 순국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이었다. 이순신장군의 8대손으로 통제사가 된 이항권이 이곳에 나라를 지켰던 장군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는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사철 푸른 육송이 404년전의 그 날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4개의 가지가 땅에서 바로 가지를 벌린채 4, 50미터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 이순신의 8대손인 통제사 이항권()이 충무공의 진충보국()의 뜻을 기리는 유허비(높이 187㎝, 폭 75.5㎝, 두께 22㎝)를 세웠다. 1973년 6월 사적 제232호로 지정되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해대교와 충렬사로 여행하려면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4월초에서 중순까지가 가장 좋다. 하얗게 핀 벚꽃과 함께 푸른바다를 달려보면 남해만의 색다른 문화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노량마을 선착장에서 관광유람선으로 다도해의 비경을 구경하는 것도 바다를 찾은 또 다른 기쁨. 해방후 1950년에 남해군민 7,000여명이 자진 헌금하여 정원과 참배도로를 닦았고 1965년에 박정희 전대통령이 이락사(), 대성운해() 액자를 내렸으며 1973년 4월 사적으로 지정하고 경역을 정화했다. 1991년에 첨망대 누각을 세웠으며, 1998년 12월 16일에 이충무공께서 유언한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내용의 한문 유언비를 이락사 앞뜰에 세웠다. 이충무공 순국 400주년이 되는 날, 남해군은 추념식행사로 노량해전을 재연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 6.,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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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락사가 보인다.  소나무들이 어쩌면 저렇게 열병하듯 숙연히 늘어서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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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망대 (관음포 바다를 보는) 가는 길.  이락사에서 첨망대까지는 500미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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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망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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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망대에 올라 노량 앞바다를 바라 보며.  역광이라서 사진은 좀 -.-

전망대가 아닌, 우러를 '첨'이다.  

 

첨망대()
한려수도를 따라 유유히 남해노량 앞바다에 이르면 관음포가 바라보이니 이곳이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7년 전쟁중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신 곳으로 이락산 마지막 지점(500m)에 첨망대를 세워 이충무공이 순국한 지점을 바라볼 수 있게 남해군에서 1990년 2층 건물로 건립하였다. 첨망대에서 바라보면 노량해전의 전장이 한눈에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 6.,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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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관 시간이 급하여 서둘러 내려 오다가 다시 이락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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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운해

 

관음포 앞바다 해안에 위치한 이곳은 이충무공의 영구를 맨 먼저 육지에 안치했던 곳이다. 공이 순국한지 234년 후인 1832년(순조32)에 공의 8대손 이항권이 왕명에 의해 단을 모아 제사하고 비와 비각을 세워 이락사라 칭하였다. 대성운해(大星殞海,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편액이 붙은 이충무공 묘비각 안에는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가 비문을 짓고 형조판서, 예문관 제학 이익회가 쓴 유허비가 있다.(일명 이락사, 사적 제2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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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관 밖으로 야외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저 멀리 여천 공단이 보인다.  (이순신대교도 희미하게) 오른쪽으로는 광양제철 단지.  가까운 것 같아도 바다를 돌아 가야 하므로...  많은 느낌을 교차하게 만든 노량 바다.  안타깝고 분하고 원통하고 비장하고..  난세와 구국의 영웅이 없었다면 이 평화로운 바다도 없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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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격랑의 세월과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묵묵히 잠들어 있는 바다

하필 그 전쟁이 낳은 가장 큰 별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끝나다니 ㅜㅜ 조선은 철저히 유린되었고, 안 망한 게 신기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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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  어귀도 슬프고 가슴 시리기도 하다.  이 날 관음포 바다 색깔은 옥색을 띠고 있었다.  바다 바람으로 이는 물살을 보고 있으면

분위기로 인해 자연스러운 비장함이 스며든다.  충무공이 없었으면 이 나라도 없었을 테고, 다시 400년 후 또 다시 점령을 당하고 역사가 반복되었으니 얼마나 통한스러운 일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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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6184&cid=42840&categoryId=42855

<답사여행의 길잡이 - 충렬사와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영상관 건물 옆에는 '이순신 장군 추모공원'도 건립 중에 있다.  전몰유허지 일대는 성지로 만들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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