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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unbonggil.or.kr/이튿날 일정은 상해 현지기업 E Mart 방문, 한국인이 상하이를 방문하면 당연 들러야 할 루쉰 공원과 임시정부유적지,
그리고 예원, 실크 공장 견학을 거쳐 야간 비행기로 북경으로 넘어 가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자랑한다.
야간 비행기가 더구나 이유도 모른 채 연착되어 나중에 새벽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산업시찰이 아닌
'극기훈련'을 온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상해국제금영호텔이란 곳에 머물렀고 사진은 아침에 호텔 방에서 zoom으로 당겨 찍은 거리의 모습이다.
그 밑의 사진은 전용버스로 이마트를 가던 중, 신호등 앞에 줄 서 있는 자전거의 행렬들..
무지 바쁜 하루.  중국인들도 갈 길이 바쁘겠지만 우린 더 바쁘다.  전날 약간 쌀쌀했다고 느껴진 거와는 정 반대로 오늘은 반팔을
입어도 될 만큼 벌써부터 무더운 상하이의 날씨를 느끼게 되는 거 같다.


SH32.jpg
상해 현지기업 E-Mart 방문.  여기선 꽤 많은 시간이 할애된 거 같다.  점포 크기는 대단하다.
회사 제품들, 특히 기저귀와 크리넥스 제품들의 가격과 진열 현황 등을 조사하는 시간이었으나 솔직히 먼저 매대에 가서
잠시 동안만 제품 조사를 하고 나서 다들 우르르 안주거리들을 사거나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물품들을 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많은 시간에 제품조사를 하기엔 좀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기타 제품들을 구경하면서 느낀건데 구매욕구와 연결되는 물건들이 별로 없다.  솔직한 느낌은 질이 떨어지고 디자인 등도 별로 손길이 안간다.  만지작 거리고 살펴 보다 결국 아무 것도 안 샀던 거 같다.


SH33.jpg
루쉰공원 입구. 중국의 대문호 루쉰 (1881 ~ 1936)의 무덤이 있는 기념공원.
우리에게는 홍구공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윤봉길 의사가 일왕의 생일날 도시락 폭탄을 선물한 (?) 쾌거의 현장이다.
내부에는 루쉰의 일대기와 업적을 정리한 기념관과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매정이란 조그마한 건물이 있다.
우린 물론 의거현장을 보러 간다.

* 루쉰:  근대화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으로 갈팡질팡하던 중국인들에게 루쉰은 시대에 부응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라지만 루쉰은 시대를 초월한 실천적인 문인이었다.  대표적인 반일운동인 5.4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젊은이들을 계도하는 일에도 앞장 선 것.  특히 일본에 맞서기 위해 민족의 대단결을 주장한 것이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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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공원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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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에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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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열해 있는 나무 가지들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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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풍경.  벌써 73년 전의 초조함과는 대조적인...


SH38.jpg
윤봉길 의사의 의거현장을 기록한 표지이다.  이 날이 4월 27일이었는데 의거일이 32년 4월 29일이다.
때마침 적절한 방문이 아니었나 한다.  가이드의 설명을 시작으로 숙연해 지기 시작한 순간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가 개최한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 전쟁범죄좌 수괴를 섬멸했다.  일본 육군성은 1932년 9월 외무성에 '상하이 천장절 폭탄 흉변사건' 문서를 작성해 보고하는데 요시노리 대장이 공무수행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윤의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공대원 (군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윤의사를 군인으로 다루어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단심으로 형을 확정한 후, 군 형무소에 구금했다가 군부대 영내에서 총살형을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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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의거현장 장소에다가 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도록 만든 '매정'이란 곳.
윤의사의 호는 '매헌'이다.  각종 기록 사진들과 한국어 설명을 들었다.

거사 직후 중화민국의 총통이던 장제스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며 극찬했다.
이후 폭탄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데 바로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고 상하이 임시정부가 폭탄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며 상하이를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때 전 중국과 한반도를 기쁨으로 들끓게 했던
사건의 진원지이지만 1994년 이전까지는 표석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다가 뒤늦게 기념관 '매정'이 세워졌다.
윤의사가 조선인이었슴을 나타내듯 한옥으로 지어져 있지만 그 대단한 의미보다 훨씬 초라해서 역사의 현장을 방문한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솔직히 많이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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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사의 흉상.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는 27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74돌을 앞두고 27일 윤 의사가 조선 청년의 각성을 촉구하고 조국 독립전쟁 참여를 당부하며 쓴 ‘광복가’ 친필을 일반에 공개했다.

광복가는 “피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무궁화 삼천리 우리강산에/왜놈이 왜 와서 왜 걸대냐/…피끓는 청년제군들아 준비하세/군복입고 총 메고 칼 들며/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라고 쓰여 있다. 친필은 1932년 4월27일 거사 이틀 전 윤의사가 훙커우공원을 답사한 뒤 숙소 동방공우에 돌아와 김구 선생 요구로 수첩에 쓴 것이다. 달필로 알려진 윤 의사가 흘려쓰고 고친 자국이 있는 것은 긴박했던 상황과 윤 의사 심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고 조카 윤주(59·기념사업회 이사)씨는 설명했다. 광복가가 적힌 수첩 원본은 김구 선생이 해방 후 갖고 귀국했으나 해외에 유출됐다 다시 돌아와 현재 서울 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이상 한겨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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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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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사의 친필을 본 떠 만든 것.  "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 한층 더 강인한 사랑 --

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 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1930년 10월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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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방치한 윤의사의 시신을 발굴하는 사진들이다.  유리 전시관에 비친 젊은 친구의 표정이 왠지 의연해 보이는 듯..
불과 24년을 애국심에 불타 아깝게 사라져 간 인물.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편안히 숨을 쉬고 안일한 게으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아파할 지...
본국도 아닌 머나먼 타국에서 이런 혼령 덕분에 나라를 되찾았다.  대체 나라를 빼앗기고 되찾는다는 걸 우린 상상이나 하고 느낄 수나 있는가.  어찌 보면 무지몽매하거나 치기에 빠질 수도 있는 20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이런 젊은 애국 지사의 혈기의 후손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러워야 하지 않을런지..
창밖을 바라 보며 의거를 앞두고 만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을 윤봉길 의사를 진심으로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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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근아빠 2006.04.29 09:31
    여기하고 임시청사를 방문하면.. 애국심이 절로 생기죠.
    임시청사 건물은 곧 재개발로 없어진다고 해요.
    이럴땐 한국정부의 무관심이 짜증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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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유진 2006.05.02 08:35
    허걱!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우째 그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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