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0 23:05

선소, 고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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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행 4일째, 여수 둘째 날

 

 

선소:  거북선을 만들고 대피시키고 출정시켰던 곳.  

 

http://www.ystour.kr/tourism/tour/tourMUserList.do?mode=detail&cur_page=1&m2=1&searchWord=&m3=14&others=DB&trSeqId=73

 

1995년 4월 20일 사적 제392호로 지정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이 조선기술을 가진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장소이다. 이곳에는 현재 자연적 지세를 이용하여 거북선을 대피시켰던 굴강()과 거북선을 매어 두었던 계선주(), 돌벅수(돌장승) 6기(동벅수 2기, 서벅수 2기, 굴강변벅수 2기), 수군들이 칼을 갈았다는 세검정지()의 초석이 남아 있다.

돌벅수는 마을에 들어오는 재앙과 역병을 막는 역할뿐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를 지키는 호국 벅수로서 역할을 했다. 《난중일기》《임진장초()》에 명시된 거북선 소속 명칭으로 보아 거북선은 본영인 여수의 선소를 비롯하여 순천 선소, 방답진 선소(돌산 선소) 등 세 곳에서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수 선소유적 [麗水 船所遺蹟]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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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 부분에 복원된 선소 터.  오른쪽이 시청 주변, 우리 숙소 있던 동네.  고만고만한 모텔, 호텔급들이 죽 늘어서 있고 주변에 유흥가들이다.

 

 

http://www.ystour.kr/tourism/lodge/lodgeUserList.do?mode=detail&&m2=3&m3=01&ldSeqId=392

우리 잤던 여수 숙소 - 힐하우스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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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이 배를 만들었던 곳으로 알려 진 곳.  위치상 천연의 요새로서 고려시대부터 배 만드는 곳이 있었다 하고 주변은 선소마을로 불림

전라좌수영 산하 순천부 선소 기지로 추정되며 일제 강점기 거치면서 주변 유적 유물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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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가 왜 중요한 것인가.  바다의 가치를 알지 못한 조선시대에 크게 번성했던 지역은 아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당하여 경상도가 왜군에게 유린 당하면서 영남과 호남 경계에 있는 여수반도가 왜군의 진격을 막아낸 전략적 요충지로서 빛을 발했다.  여수는 이순신 장군을 만나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수 어디를 가나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발견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군수지원품을 본국에서 보급 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호남은 곡창지대로서 왜군이 만약 호남을 차지한다면 군량미 조달이 쉬워져 조선이 패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 -

 

1593년 8월 ~ 1601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했던 여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임진왜란 14개월 전, 46세)에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정3품) 로 이곳 여수에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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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굽자 형으로 복원된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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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보이는 것이 군기고 (수군기).  오른쪽이 세검정 (집무, 지휘소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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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돌이 계선주 (배 묶어 두었던 돌)

 

 

 

아래는, 찾느라 고생했던 '고소대' - 이 충무공 관련 비석이 있어서 유적지로 찾아간 곳.

희한하게 여수 기상대 (고소대 근처) 앞으로 네비게이션이 가르쳐서 입구가 고소동 벽화 골목 아래 쪽에 있었는데 왜 여기로 안내했는지...

(더구나 이상한 우편배달부 아저씨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 낭비 가중)

 

http://www.ystour.kr/tourism/tour/tourMUserList.do?mode=detail&cur_page=1&trSeqId=65&m2=-1&searchWord=&m3=&others=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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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대:

 

전라좌수영 성체의 치성() 위에 세운 포루의 일종으로서 장대()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형태

『호좌수영지()』에는 동문() 좌포루()가 5칸으로서 1773년에 절도사 김영애가 고소대() 구지()에 새로 지어 물거정()이라 개명하였다고 했으며, 「영성도()」에는 안산() 기슭의 성체 위에 3칸의 고소대를 그려 두었다.

고소대가 언제 훼철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영()이 혁파되면서 함께 훼철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곳에는 1947년에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와 여수 타루비()를 안치하기 위한 비각이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리고, 원형기둥 위에 익공()을 가미한 다포식()의 공포를 짜 올렸다.

현황

『전라남도 여수군읍지』의 「고소대중수기()」는 다음과 같다.

"여수 땅은 호수와 산이 옷깃처럼 둘러 있어, 예로부터 정자로서 올라 볼 만한 명승지가 많은데, 고소대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로 정자에 올라 보지 않아도 이름이 벌써 좋다. 또 한산사()라 부르는 절이 고소대의 서쪽에 떨어져 있으니 가까이서 바라보면 종소리가 은은하여 들을 만하다.

그 대()를 ‘고소()’라고 이르는 것은 이 까닭일지어다. 내가 전에 고소대에 올라서 시험 삼아 바다를 바라보니, 산봉우리들이 은근히 연운()이 아득히 아른거리는 속으로 잠겼다 나왔다 함이 보였으며 장사배와 고기잡이배들이 종청으로 푸른 나루, 푸른 파도 가운데 벌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소대의 아름다운 경치이다.

만약에 바위가 들린 곳에 조수가 일면 배를 매던 옛 풍진을 상상할 수 있는데, 경도()엔 대나무가 늙어가는 칼을 씻던 옛 언덕이 여전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옛 전장을 조상하는 회포를 갖게 한다. 이것은 바로 악양루기()에서 이른바, ‘감상이 절정에 다달아 슬퍼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의 터전에서 메워진 해자와 허물어진 초석을 굽어보면 눈에 가득 근심이 걸리니, 이것은 또 “능허대기()의 흥폐()가 서로 찾아오는 운수다.”라고 말하던 것이다. 조심하던 사람들이 오래도록 개축할 것을 도모했는데, 생각하니 군무()가 얽혀서 손 쓸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성황()과 제단()을 세우는 일로 인한 그 나머지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여 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수했다.

수서기() 김준혁()이 그 일을 맡아 열흘이 못 걸려 완공을 보았다. 이에 다함이 나타나니 운물()이 더욱 빛이 났다. 나는 공무가 끝나고 한가한 겨를이 있으면 두서너 사람들과 그 위에서 술을 마시며 바람을 맞으며 짐짓 이 기()를 쓰노라."

[네이버 지식백과] 고소대 [姑蘇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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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덥지근했던 날씨에, 고소대라는 곳 찾기가 어렵고 힘들었는데 찾게 되어서 참 다행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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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stour.kr/tourism/tour/tourMUserList.do?mode=detail&cur_page=1&m2=1&searchWord=&m3=14&others=DB&trSeqId=601

(여수관광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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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이공수군대첩비 (혹은 좌수영대첩비 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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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이공수군대첩비

 

보물 제571호. 높이 305㎝, 너비 124㎝, 두께 24㎝. 우리나라 최대의 대첩비로,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다.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의 비문에는 이순신의 활약상이 적혀 있어 해남·노량·고금도·통영·아산 등에 세워졌던 충무공전공비()와 함께 애국충절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대리석제 비신은 화강암제의 귀부() 위에 세워져 있고, 그 위에 연화문과 운룡문이 새겨진 화강암제의 관석이 개석으로 얹혀져 있다. 비문은 1615년에 당대의 명사 이항복()이 지었다.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신 상단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라는 두전()은 김상용()이 썼다.

한편 같은 장소에는 1698년(숙종 24) 남구만()이 지은 형지기(: 조사한 상황이나 전말을 기록한 책)가 있다. 그 기문()에는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하였던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1620년에서야 비로서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를 건립하게 되었으며, 이 때 타루비(보물 제1288호)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의 전말이 밝혀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 [麗水統制李公水軍大捷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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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비

 

 

1998년 12월 4일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되었다.

비석은 이순신 장군이 순절한 지 6년 후인 1603년(선조 36)에 이순신 장군 막하에 있던 군사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영하수졸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우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역삼십일년추립(使 )’이라고 적혀 있다. 즉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은 타루이다. 중국의 양양 사람들은 양우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1603년 가을에 세우다.’라는 내용이다.

꽃무늬를 새긴 대석() 위에 연화()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운문()과 연()봉오리형으로 된 개석을 얹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루비 [墮淚碑]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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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4일 보물 제571호로 지정되었다. 대첩비 높이 305cm, 너비 124cm, 두께 24cm. 타루비 높이 94cm, 너비 59cm, 두께 19cm이다.

좌수영대첩비는 1615년(광해군 7)에 지금의 여수시 충무동에 세웠던 이순신의 전승기념비로 비문은 이항복()이 짓고 김현성()이 썼으며 전()은 김상용()이 썼다. 그 내용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말 일인 경찰서장에 의하여 감추어졌다가 8·15광복 후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을 1948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타루비는 이순신이 전사한 6년 후인 1603년(선조 36)에 부하들이 이순신을 위하여 세운 비로, 비문에 의하면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석을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 하였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좌수영대첩비 [左水營大捷碑─墮淚碑]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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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반출하려던 것을 경복궁 뜰에 몰래 숨겨 두었다가 해방된 이후 해남 여수에서 서울로 사람을 보내 수소문해서 찾았던 비석

국보도 유산도 나라가 유린되어 몰래 감추고 마당에 뒹굴러 다니던 것을 간신히 우연히 찾아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타루비'는 한자임에도 어감도 그렇고 그 의미 때문에 그런지 괜히 슬픈 느낌이 든다.

맨 왼쪽 비각 칸 안에는 '동령소갈비'(東嶺小喝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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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령소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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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도 고소대도 평일 시간대에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번 여행의 주 목적과 핑계가 이순신 장군 유적지 탐방이 1순위 였는데, 뜨거운 한 여름 간간히 햇볕이 구름 속에 가리면서 부는 바람 한 점에도 그 때를 생각하자니 마음이 스산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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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고소동 벽화 마을이었다.  충무공이 전란 때 사용했던 전술 비연이 담장에 그려져 있다.  교육 자료로도 쓸 수 있겠다 

(근데 장군의 얼굴은 명량의 최민식을 본따 그린 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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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뜻과 의미가 다르다.  다른 분들 블로그 링크

 

http://blog.naver.com/ks3121?Redirect=Log&logNo=150049031782

 

http://blog.naver.com/ks3121/22018062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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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동 벽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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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쪽 골목으로 꼬불꼬불 내려가서 고소대를 찾았다.  멀리 진남관이 보인다.  고소대 입구는 바로 진남관에서 맞은편 방향인데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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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10:34
    여수에 와서 "선소"를 찾는 관광객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족이야 그 목적으로 갔으니 당연히 코스에 잡혀있었지만 관심없는 사람들은 그냥 패스했을 곳..선소에 거북선 하나 띄어놓으면 훨씬 좋을텐테 말야.

    고소대도 찾기는 쉬운곳인데 우리가 엄한곳으로 가는 바람에 여수 기상청까지 갔었으니...^^
    여수에 이순신장군을 뵐 목적으로 갔으면 지나치면 안되는 곳..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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