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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16:11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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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조선의 주자가 되고 싶었던, 송자(宋子)

[宋時烈 ]

출생 - 사망 1607 ~ 1689

 이미지 1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까지 연상하게 만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가문과 일생

송시열은 은진(恩津) 송씨로 그의 가문은 역대로 충남 회덕이 세거지였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이다. 그의 집안이 회덕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9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들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이후 회덕 백달촌에 송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송촌(宋村,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이라 불렀다.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이었다.

은진 송씨가 회송(懷宋)이라고 불릴 만큼 지역사회에 깊은 연고를 가지게 된 것은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8-1446)부터이다. 1432년(세종 14년)에 송유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백달촌에 쌍청당을 짓고 살았는데, 뜻을 받든 후손들이 쌍청당을 정성껏 지켜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진 송씨 집안은 송유 이후 크게 현달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벼슬길이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은진 송씨 가문은 송규연, 송규렴, 송상기, 송준길, 송구수, 송시열 등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외가가 있는 옥천 적등강가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선산 곽씨 집안은 옥천에 세거지가 있었으며, 외할아버지는 임진왜란조헌과 함께 목숨을 바친 의병장 곽자방이다. 우암을 낳을 때 어머니 곽씨는 명월주를 삼키는 태몽을 꾸었고 부친은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인 성뢰(聖賚)는 부친이 꾼 태몽에 따른 것이다.

송시열이 친가가 있는 회덕으로 간 것은 여덟 살 되는 1614년이다. 이 때 친족인 송이창 집에서 송이창의 아들이자 쌍청당의 7대손인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함께 수학하였다. 11세가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년)부터는 아버지 송갑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송시열의 성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친 송갑조는 광해군시절, 사마시에 함께 합격한 이들이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에 인사하지 않겠다는 것에 반발하여 홀로 서궁에 찾아가 절을 할 정도로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이 일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어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 뒤로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아들 교육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자율곡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열두 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625년(인조 3년)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이씨는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1627년 이후 송시열은 연이은 큰 슬픔을 당하게 된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만 맏형인 송시희가 운산에서 전사했고, 22세인 1628년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마친 뒤인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갔다.

1633년(인조 11년) 송시열은 27세의 나이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시제(試製)로 논술하여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635년 11월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년간에 걸친 사부생활은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에게 북벌을 당부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은 송시열의 전 생애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절친한 동문인 윤선거(尹宣擧)와도 갈등을 빚었고, 윤선거의 아들이면서도 그가 총애한 제자 윤증과도 결별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분쟁도 일어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송시열은 관직 생활의 뜻을 접고 충북 황간으로 낙향하여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북벌계획을 구상하며 강학에 힘을 기울였다. 낙향한 그를 인조가 여러 차례 불렀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인조의 계속적인 부름에 응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모양새로는 그가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경세(經世)에 뜻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인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였다는 인연으로 송시열을 불러 곁에 두고 싶어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몸소 겪은 왕이었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고자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스승인 송시열이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 원로들을 궁궐로 초빙했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할 것을 밝혔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의 합당함을 제시하고 북벌이야 말로 국가대의라는 것을 표방하였다.

[기축봉사]는 밀봉한 채로 효종에게 바쳐졌다. 모두 13개조로 되어 있는 이 봉사에서 송시열은 ‘대일통(大一通)’의 큰 뜻을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조목은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할 것(節哀以保身)부터 정사를 바르게 하여 오랑캐를 맞설 것(修政事以禦外侮)’에 이르기까지 군왕으로서 지켜야할 내용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오랑캐란 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지극했다. 왕이 청에 대한 북벌을 계획할 때면 사관이나 승지마저 멀리한 채, 독대로 의논할 정도였다. 효종의 총애를 받은 송시열이지만, 인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조정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효종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했다. 효종의 끊임없는 구애는 계속되었다.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화양동 생활과 제자 윤증과의 불화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제일주의자’였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입버릇처럼 되내이자, 효종이 “경은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내우외환이라는 주자가 당면했던 문제가 조선의 당면 문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 인해 주자가 제시했던 대책은 지금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이 건국된 상황은 송(宋)과 똑같기 때문에 그 말류(末流)의 폐단 또한 서로 비슷합니다. 국력의 강하고 약함도 비슷하고 지방 관리들의 부패도 비슷하며, 호강(豪强)한 자가 제맘대로 난폭하게 구는 것도 비슷합니다. 주자는 당시에 눈으로 이런 것들을 보았으므로, 말한 바가 매우 절실하고 정성스러워 그 병에 꼭 들어맞는 처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이 약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숙종실록] 권 14, 숙종 9년 6월 경자일

송시열은 유학의 정맥이 윤휴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반감은 훗날 그가 총애하던 제자 윤증과 불화하는 이른바 회니시비라는 노소분당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회덕에 살던 송시열과 니산(尼山)에 살던 윤증은 사제지간이었고,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생전에 율곡의 연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윤선거가 윤휴의 논지를 인정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었는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를 원만하게 이끌려는 것이었지만,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에 피난해 있었는데, 강화가 함락되려 하자 부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순절하였다. 이때 윤선거는 부친 윤황을 만나기 위해 강화도를 탈출하였고, 부득불 혼자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긴 윤선거는 폐인을 자처하며 벼슬길을 사양하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은둔생활을 했다. 윤선거가 1669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그의 아들 윤증은 박세채가 써준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윤증의 부탁을 받은 송시열은 마지못해 ‘박세채가 윤선거를 칭송하는데 나는 박세채를 믿으니 그의 말을 술이부작(述而不作)한다’고 했다. 박세채의 말을 인용하되(述而), 윤선거를 칭송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不作)는 말이었다. 송시열은 묘갈명을 지어 윤선거를 칭송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윤증의 간곡한 부탁에도 송시열은 글자 몇 자만 고칠 뿐이었다. 윤선거의 묘갈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 윤증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영욕의 삶

효종의 스승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송시열이지만, 효종의 죽음과 함께 영욕의 삶도 저물어갔다. 1660년 송시열은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았고,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감으로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으로 은거했다. 1666년 8월에 화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화양동을 출입하며 산수를 즐겼고, 강학을 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화양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도 1668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하였고, 1674년 2월 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제문제로 실각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듬해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지 석방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76세 되던 1682년에 김석주등 훈척들이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 하려는 작업을 했다. 이 때 송시열이 주동자 중의 한명인 김익훈을 두둔했는데, 김익훈은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였다. 실망한 젊은 선비들은 송시열을 비난했고, 제자인 윤증과도 반목이 더욱 심해졌다. 이 일로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으로 다시 은거하였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붓으로 세상을 움직인 노론의 영수, 신화가 되다

송시열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송시열과 관련한 대표적인 지역을 꼽으라면 ‘화양동’일 것이다. 1803년 가을 음성현감이 된 성해응이 부친 성대중과 화양동을 답사하고 지은 [화양도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 송시열과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우암 송시열은 태어날 때 산천의 정기를 타고 나 하루는 세자가 그의 안광을 보고 기절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우암이 기거하던 초당에 매년 봄이 되면 활짝 만개하던 홍매(紅梅) 한그루가 있었는데 1689년 사약을 받은 해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그러다가 갑술년(1694)에 경술환국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자 죽었던 매화가 다시 살아나 꽃을 활짝 피웠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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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열 [宋時烈] - 조선의 주자가 되고 싶었던, 송자(宋子)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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