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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16:19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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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실사구시 정신으로 이룩해 낸 학문과 예술혼

[金正喜 ]

출생 - 사망 1786 ~ 1856

 이미지 1

 

한국사에서 19세기 최고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篆刻) 또한 최고의 기술을 가져 천재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 하늘이 내린 자질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어릴 적 이름은 원춘(元春)이다. 김정희만큼 호가 많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외에도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천축고(天竺古先生) 등 생전에 100여 가지가 넘는 호를 바꿔가며 사용했다.

천재의 출생이니만큼 탄생 일화가 없을 리 없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이 아닌 24개월 만에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어날 무렵 시들어가는 뒷산 나무들이 아기 김정희의 생기를 받아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탄생일화는 천재를 포장해주는 이야기일 뿐이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정희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더불어 조선후기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 인물이다. 김한신이 39세에 후사 없이 죽자 월성위의 조카인 김이주가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 이가 김정희의 조부이다. 추사는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큰댁으로의 양자 입양은 조선후기 양반가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어린 김정희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번암 채제공이 집 앞을 지나가다가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立春帖)’ 글씨를 보게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글씨임을 알아차린 채제공은 문을 두드려 누가 쓴 글씨인지를 물었다. 마침 친아버지인 김노경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했다. 글씨의 주인공을 안 채제공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해 질 것이니 절대로 붓을 쥐게 하지 마시오. 대신에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입니다.” [대동기문(大東奇聞)]

김정희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에서 보냈다. 월성위궁은 영조가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김정희가 서울집이 아닌 예산에서 출생한 것은 그때 당시 천연두가 창궐하여 잠시 이주한 것이라 한다. 월성위궁에는 매죽헌이라하여 김한신이 평생 모은 서고(書庫)가 있었다. 수많은 장서는 김정희의 학문세계를 바다처럼 넓게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 노경은 아들의 자질을 알아보고 당시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 밑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스승이었던 박제가 역시 어릴 적 김정희의 ‘입춘첩’ 글씨를 보고 “이 아이가 크면 내가 직접 가르쳐 보고 싶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1800년 열다섯의 나이에 한산 이씨와 결혼한 김정희는 이 시기를 전후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에 부닥쳤다. 이미 십 대 초반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고 결혼 이듬해인 1801년에는 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1805년에는 부인인 한산 이씨와 사별했고, 뒤이어 스승인 박제가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10대 시절은 끊이지 않는 집안 흉사로 고통과 외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한중문화 교류사에 족적을 남기다

한산 이씨와의 짧은 인연을 뒤로하고 김정희는 23세인 1808년에 예안 이씨와 재혼하였다. 그 뒤로는 흉사도 그쳤고 평안함을 되찾았다. 생부 노경이 호조참판으로 승진했고 또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가게 되었다. 당시 사마시험(생원·진사 자격을 주는 과거시험)에 합격했던 김정희는 외교관의 자제(혹은 친인척)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하였다. 사행단의 한 사람으로 연경에 가서 외국 견문을 넓히고 온 경험은 인생의 전환기라 할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연경을 세 번이나 다녀온 스승 박제가의 영향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낱낱이 밝혀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는 20세기 초에 한국 인사동 서점가를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청나라 화가 주학년이 김정희에게 보내준 그림, 그 유명한 세한도 등을 발견하여 구입하였다. 후지츠카의 연구로 조선의 북학파들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김정희 등이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조선후기 지성사를 찬란하게 비추었음이 밝혀졌다. 부친을 따라 김정희가 북경으로 출발한 것은 1809년 10월 28일이다. 북경 체류 기간은 2달 남짓이었는데 이 사행길에서 2명의 중국인 거유(巨儒)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5~1848)이었다. 김정희는 옹방강, 완원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고증학의 진수를 공부하였다. 연경학계의 원로이자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찬탄했고,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애정어린 아호를 받았다. 후지츠카는 이들의 만남을 한중문화 교류사의 역사적 사건이라 평가했다.

스승인 박제가가 만났던 나빙이나 기균과 노대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김정희는 북경에서 옹방강, 완원과 같은 스승 외에도 이정원, 서송, 조강, 주학년 등 많은 학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1810년 2월 1일 조선으로 돌아가는 김정희를 위해 북경 법원사에서 송별연을 열었다. 주학년은 송별연 장면을 즉석에서 그림으로 그리고 참석자 이름을 모두 기록했다. 그 당시 주학년이 그린 전별도 실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1940년 이학년이 모사한 그림이 과천시 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연경학계와의 교류는 귀국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만년까지 계속되었고 김정희의 학문 세계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북경 법원사. 김정희와 중국 문인들이 만났던 곳이다. <출처 : 정성희>

실사구시 정신을 실현한 학문세계

김정희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실사구시’로 요약할 수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청나라 고증학자 고염무가 주창한 것으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김정희는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문학에 대한 식견도 괄목할 만한 정도였다. 일식과 월식 현상 등 관측에 근거하여 서양천문학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1821년 34세의 김정희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출셋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10여 년간 김정희와 부친 김노경은 각각 요직을 섭렵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지러운 정국과 정쟁의 파고 속에서 1830년 부친 김노경이 탄핵받는 일이 발생했다. 아들로서 김정희는 꽹과리를 치며 부친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에 절도안치(絶島安置,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하는 형벌)되었다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들 부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838년 김노경이 세상을 떴고 김정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훈풍도 잠깐,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 세력들이 이번에는 김정희를 공격하여 그를 관직에서 끌어내렸다.

추사체와 세한도를 완성한 예술혼

김정희는 혹독한 고문 끝에 제주도에서 서남쪽으로 80리나 떨어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위리안치(圍離安置)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현재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옛 대정현 현청에 이웃한 김정희의 적거지는 복원된 것으로 유허비와 함께 조그만 유물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봉은사에 있는 추사 친필의 현판. <출처 : 정성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특히 유배 기간 중 부인과 며느리 등과 주고받은 40통에 달하는 한글 편지는 그의 인간적 면모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배 기간 동안 화가이자 제자인 소치 허유(1809~1893)가 세 차례나 제주도로 건너가 수발을 들어준 일은 유명하다. 소치는 충심으로 스승인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제주도 유배기간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최고의 걸작품인 ‘세한도’도 이 시기에 그려졌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이다. 1844년 그의 나이 59세에 수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유배 기간 중인 1842년 11월 13일, 유배생활 내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1849년 9년간의 유배를 끝으로 마침내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서울 용산 한강 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는데, 다시 모함을 받아 1851년 북청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다행히 귀양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는 이제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 밑을 뚫고, 1천 자루의 붓을 망가뜨릴 정도의 예술혼을 지녔던 김정희는 말년을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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