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3. 18 (토)

인천 개항장거리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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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지계단 아래, 대불호텔 근처에 주차해 놓고 투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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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후루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탕수수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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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 공화춘. 옛날 공화춘은 문을 닫았고, 이후에 다른 공화춘이 음식점 성업.

소스 없는 간짜장 식의 해물 짜장을 몇년 전 먹어 봤었다.  그때 비쌌는데 더 비싸졌을 거고 줄은 어마어마하다

남편 단골이었던 '자금성'은 문 닫은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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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이 예전 공화춘 건물. 짜장면박물관으로 변신.

근처 박물관 5곳 묶어서 입장료 3400원 지불. 한중문화관은 몇년 전 관람했었는데 거기 skip하려면 갈 곳만 구매하는 것이 좋았을터인데 생각못했다.

https://ijcf.or.kr/load.asp?subPage=522.05

짜장면박물관은 입장료 1000원. 

 

공화춘의 전신은 산동회관, 중국인 전용주거지인 청국 조계지에서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 숙식업소로 시작.  1911년 산동성 출신 화교 우희광이 지금 위치로 이전 개업했다가 1912년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국의 봄'이라는 의미의 공화춘으로 개명하였슴. 일제강점기 이후 인천 서울의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경인지역 최고급 요리점으로 70여년간 명성을 이어왔고 6.25 전쟁 이후에 짜장면 등 대중음식을 보급하였다.  화강암 석축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벽돌조 건물로 화교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이다.   연안부두 신축으로 인천역 일대 상가가 쇠락하면서 1983년 영업을 중단하였고 2012년부터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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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춘현판.  제작연대가 1950년대 이전으로 추정됨.  위 '공화춘', 아래 왼쪽 '포판회석' (연회석완비), 아래 오른쪽 '특등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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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청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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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들의 생계수단 3자루의 칼.  육도 채도, 전도, 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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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을 먹는 노동자.  1890년대를 전후하여 인천 부둣가는 외국과의 무역이 한창이었고 배에서 내리고 싣는 물건을 나르기 위해 고용된 수많은 짐꾼과 인력거꾼이 필요하였는데 대부분 산둥지방 출신 노동자인 '쿨리'였다.  이들은 별다른 재료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 메뉴인 짜장면을 먹었는데 이들을 상대로 손수레 노점상이 하나 둘 생기면서 '짜장면'의 보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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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시실.  1930년대 공화춘과 짜장면

문득, 한참 일제의 악랄함이 강화되던 시기..  독립운동가들은 피폐한 삶을 살았을 터인데..  이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독립은 너무나 요원하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포기하며 살았을 것이다.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상류층이었을 것이며.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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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시실 짜장면의 전성기 1970년대.  졸업식 후 최고의 외식메뉴 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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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표춘장.. 저런 게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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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입학하고 동문회 모임 때 짜장면 집에서 모였는데..  1000원 정도였겠다.  으~ 나 너무 옛날 사람

요즘 짜장면은 7,8천원까지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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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나무로 된 가방.  무겁고 음식 묻으면 비위생적.  플라스틱 시대도 있었고, 이후 우리가 아는 '철가방' 알루미늄판과 함석판 등 싼 재료 등장.

지난 반세기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속 디자인 가운데 하나로 중국음식점의 '철가방'이 선정되었다. (모나미 153볼펜, 신라면, 칠성사이다, 포니자동차, 시발택시...).  알루미늄 색상이 밝고 깨끗하고 단순하면서도 구조적인 기능이 뛰어났다.  쉽게 열리지 않는 뚜껑, 음식물을 쉽게 닦을 수 있는 편의성, 찌그러져도 원상복구가 쉬운 친근한 가변성.  후세에 물려 줄 우리 시대의 생활문화유산.  개발자나 디자이너가 밝혀지지 않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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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타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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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죽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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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원.  한중문화교류 활성화 및 관광객 휴식을 위해 중국 4대 정원 중 졸정원과 유원의 시설양식을 주제로 조성한 쉼터.  중국 전통 수목인 대나무, 장미, 모란 등을 식재하여 중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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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성당.  1960년 당시, 이곳 차이나타운에는 4천여면의 중국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고, 소수의 화교 가톨릭 신자들은 답동 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 화교 신자들의 언어 소통과 민족 이질감으로 화교들을 위한 성당을 절실히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미국 메리놀회에서 1960년 7월 화교를 위한 선린성당을 설립하고 중국 만주에서 사목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한 고요셉 신부를 초대 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현재 성당 건물은 초대 신부의 노력으로 1966년 6월에 완공된 건물이다.  설립 초기에 중국 화교를 위한 성당이었으나 고요셉 신부가 귀국하고 중국 화교 신자가 감소하며 한국인 신자 수 증가로 한국인 성당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1972년 10월 해안성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한중 합동 본당으로 운영되었고 화교 신자는 감소하여 한국인 성당이 되었다.  근처 제물진두 순교성지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과 박순집 베드로의 외가집안이 치명한 순교터로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10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곳)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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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지역 개항장 거리 볼 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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